[유럽스타트업열전] 석유 기업들이 앞다퉈 '호랑이' 키우는 까닭

[비즈한국] 지난주 칼럼에서는 전 세계 테크 업계를 흥분시킨 우버의 기업공개(IPO) 국면에서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빌리티 시장의 틈새를 파고들어 투자 유치에 성공한 ‘히치(Heetch)’를 소개했다. 히치에 3800만 달러(440억 원)의 시리즈 B 투자를 주도한 자본은 프랑스 석유회사 ‘토탈’의 스타트업 투자 조직 ‘토탈 에너지 벤처(Total Energy Ventures: TEV​)’였다. 

토탈의 모빌리티 투자는 이뿐만이 아니다. 작년 5월에는 앞선 칼럼에서 소개한 스페인의 물류 운송 스타트업 ‘온트럭(OnTruck)’의 2500만 유로 시리즈 B 투자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또 유사한 사업 모델로 중국에서 80만 대의 트럭에 지능형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G7에도 지분 참여를 했다. 지난달에는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인공지능 기반 지능형 교통 정보 시스템 스타트업인 스위프틀리(Swiftly)에 초기(시리즈 A) 자금을 투자했다. ​

‘슈퍼메이저’ 또는 ‘빅 오일’이라고 부르는 세계 6대 석유기업으로 연간 매출이 2090억 달러(250조 원)에 달하는 ‘토탈’이 모빌리티 스타트업에 투자한 이유는 뭘까?​

우버와 히치, 온트럭을 비롯한 모빌리티 스타트업은 서로 다른 서비스를 선보이지만, 궁극적인 공통의 목표는 결국 도로 위를 달리는 차량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인공지능, 빅 데이터, 자율주행 등 온갖 기술을 활용해 빈차로 운행하는 횟수를 줄이고 차량들의 운행 효율을 극대화함으로써 차량 소유자와 운행자의 경제적 효율을 높이고, 교통 체증이나 대기오염 등 환경적인 영향도 최소화하는 것이 이들 모빌리티 서비스들이 우리 사회와 경제에 기여하는 바라고 하겠다.

이는 얼핏 석유 기업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석유 기업들을 접하게 되는 것은 보통 곳곳에 깔려 있는 주유소들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모빌리티 서비스가 고도화되어 차량 운행이 줄고 기름을 덜 쓰게 된다면 주유소 매출은 줄어들 것이 아닌가?

신재생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화석 연료인 석유를 탐사, 개발, 채굴하고 운반해 정제 과정을 거쳐 각종 석유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거래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장악한 메이저 석유 기업들로선, 장기적으로 석유 의존도를 줄이는 신재생 에너지의 확장이 달갑지 않을 듯한데?

토탈 에너지 벤처(TEV)의 최근 스타트업 투자 목록들을 살펴보자. 스위프틀리에 투자 발표가 나기 이틀 전인 6월 3일에는 미국 시애틀의 3년 차 스타트업 레벨텐 에너지(LevelTen Energy)의 2000만 달러 투자에도 참여했다. 레벨텐의 사업 모델은 일반 소비자들이 아닌 상업·산업(Commercial & Industrial: ​C&I) 분야 고객이 다양한 신재생 에너지를 구매해 사용할 수 있는 마켓플레이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TEV는 6월 말에는 스위프틀리와 마찬가지로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인 부스터 퓨얼(Booster Fuels)의 5600만 달러 투자에도 이름을 올렸다. 부스터 퓨얼의 사업 모델은 아예 주유소에 가기 귀찮은 고객들을 위해 주차장까지 연료를 배달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석유 기업들의 소매 네트워크 기반인 주유소들의 영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업이다. 

그 외에도 가나, 코트디부아르, 세네갈 등 아프리카의 저개발 국가에서 전력망에 연결되지 못한 오지 주민들이 태양광의 혜택을 보게 돕는 PEG, 소규모 커뮤니티 내에서 태양에너지를 공유하게 해주는 미국 동부의 솔스티스(Solstice), 스마트 온도계를 중심으로 한 솔루션으로 가정 내 난방 에너지를 절약하게 해주는 독일의 타도(tado) 등이 TEV가 최근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투자한 에너지 관련 스타트업들이다. 토탈은 2011년에 미국의 주요 태양광 업체 선파워(SunPower)의 지분 3분의 2를 14억 달러(1조 7000억 원)에 인수하기도 했다. 

메이저 석유기업 중 신재생 에너지와 모빌리티 투자에 열을 올리는 기업은 토탈만이 아니다. 연매출이 토탈의 2배에 가까운 3900억 달러(460조 원)로 월마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기업인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또한 ‘쉘 벤처스(Shell Ventures)’라는 이름의 투자 조직을 운용하며 이 분야 스타트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모기업뿐 아니라 스타트업 투자에서도 경쟁사라 할 TEV와 쉘 벤처스는 올해 초 미국의 인공지능 기반 에너지 효율화 솔루션 스타트업인 오토그리드(AutoGrid)의 시리즈 D 투자자 명단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유럽계 빅 오일뿐만 아니라 영미권의 슈퍼 메이저인 셰브론, 엑손모빌, BP 등도 신재생 에너지와 모빌리티에 집중하는 벤처 투자 조직을 활발히 가동하고 있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세계 경제와 에너지 시장을 쥐락펴락하며 웬만한 국가 수준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던 석유 메이저들이, 자신들이 장악한 에너지 시장을 뒤흔들게 될지도 모를 스타트업들을 오히려 키워주고 있는 셈이다. 이들은 왜 ‘호랑이’를 키우고 있는 것일까?​

간단하다. 에너지의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현재 시장을 주도하는 에너지 가치 사슬(value chain)의 지배력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새로이 떠오르는 기술과 사업 모델에 대비한 투자를 병행하는 것이다. 화석 연료에 기반한 에너지 경제 구조가 장기적으로 신재생 에너지 기반으로 이행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그 시기가 언제일지, 그리고 어떤 경로를 거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의 에너지와 모빌리티 시장 또한 자신들의 주도하에 두기 위해 빅 오일들이 스타트업 투자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스타트업 투자를 위해 별도의 투자 조직인 ‘기업주도형 벤처 캐피털(Corporate Venture Capital: CVC​)를 운용하는 것 또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자금과 인력에 부족함이 없는 거대 기업들이 미래를 대비하는 방법은 과거에는 내부 조직을 가동한 자체 R&D 투자였다. 하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자칫 대기업 특유의 경직성에 발이 묶이기 쉬운 자체 조직보다는 스타트업 투자를 통해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이들이 택한 전략이다. 

20세기를 주름잡았던 메이저 석유 기업들이 에너지 대전환의 다음 단계에서도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이들이 투자한 스타트업 가운데 그 변화를 이끌 ‘호랑이’가 나올지 기대된다. 

필자 곽원철은 한국의 ICT 업계에서 12년간 일한 뒤 2009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현재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 담당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8년 한-프랑스 스타트업 서밋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기재부 주최로 열린 디지털이코노미포럼에서 유럽의 모빌리티 시장을 소개하는 등 한국-프랑스 스타트업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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