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차인표랑 신애라랑 사귄대!” 1994년 여름,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들불처럼 무섭게 번져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의 주인공이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차인표와 신애라 아닌가.
1994년 7월 26일 종영한 ‘사랑을 그대 품안에’는 차인표를 거대한 스타덤에 올려놓은 드라마였다. 이전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유형의 스타 탄생에 흥분한 상태였는데, 종영 뒤 불과 3주도 되지 않아 열애설이 났으니 그에 대한 반응은 역대급 무더위로 기록된 그해 여름 열기만큼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캔디형 여주인공을 좋아하지 않던 어린 나는 투덜거렸다. “아니, 세련되고 예쁜 이승연 놔두고 왜 신애라야?”(신애라님, 죄송)
‘사랑을 그대 품안에’는 캔디형 신데렐라 스토리 드라마의 원조 격이라 볼 수 있다. 서울백화점 창업주 회장의 아들이자 영업2부 이사인 강풍호(차인표)는 근육질 몸매의 잘생긴 유학파에,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고 취미로 색소폰을 부는 남자다. 자신을 잘 꾸밀 줄 알고 자신이 잘난 것을 너무나 잘 인지하고 있지만, 내면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불화로 쓸쓸했던 기억과 옛 연인 고은채(이승연)를 잃은 상처를 안고 있다.
여주인공 이진주(신애라)는 서울백화점 여성복 매장에서 판매사원으로 근무하는데, 하나뿐인 오빠가 툭하면 사고를 치는 개차반이라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신세. 가진 거라곤 5년 만기인 적금통장밖에 없지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를 외치는 캔디를 추종하는(수첩에 이 문구를 써 놓을 정도) 만큼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어지간한 건 잊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물이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고독한 왕자님과 쥐뿔 가진 건 없어도 긍정적인 성격으로 주위를 끌어당기는 가난한 아가씨의 만남이 로맨스 드라마와 영화에서 어떻게 발전하고 결말을 맺느냐는 지겹도록 보아왔을 터이다. 남녀 주인공은 우연하고도 임팩트 있는 첫 만남을 가지고, 우연한 만남은 계속 이어지고, 고독한 왕자님의 쓸쓸한 내면은 아가씨의 발랄함과 따스한 마음으로 치유가 되어 결국 키스를 나누며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그런 스토리 말이다.
하지만 1994년에는 이런 스토리가 굉장히 ‘트렌디’했다. 게다가 말했듯 강풍호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의 백마 탄 왕자였다. 고급 세단이 아니라 가죽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심지어 ‘비트’의 민이 나오기 전이다), 적재적소에 윙크를 날리거나 검지손가락을 까딱까딱 하는 멋져 보이는 제스처를 취하며 여자들의 마음을 훔친다. 취미로 클럽에서 색소폰을 불거나 스쿼시를 치는 등 트렌디한 라이프스타일이 몸에 배인 남자이기도 하다. 영업 끝난 놀이공원을 통째로 빌릴 수 있는 부(富)와 매력적인 외모, 젊음은 덤이고.
해피엔딩이 보장돼 있는 트렌디 로맨스물인 만큼 두 사람의 격차는 사랑의 힘으로 덮어진다. 진주의 머리 향기를 맡으며 “좋은 향이 나요. 무슨 샴푸 써요?”라고 묻는 풍호에게 진주가 해맑게 “말표 빨래비누로 감아요”라고 대답하는 정도이니, 이 드라마에서 구질구질하다 못해 처절한 가난의 냄새는 찾기 힘들다. 그렇다고 쫄깃쫄깃 몰입하게 될 만한 여타 이야기가 있지도 않다. 서울백화점 공동창업자의 아들인 정도일 이사(천호진)가 백화점 경영권을 두고 풍호를 몰아내려 온갖 권모술수를 펼치지만 요즘 시선으로 보면 어린애 장난처럼 어설프기 짝이 없다.
도일은 풍호의 옛 연인 고은채와 정략결혼한 뒤 은채와 풍호 사이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괴롭히면서 동시에 진주에게도 접근하지만 그렇다고 결정적으로 풍호와 진주 사이를 의도적으로 방해하지는 않는다. 이러니 텐션이 떨어질 수밖에. 비장한 표정으로 풍호와 도일이 서로에게 총질을 해대던 워크숍의 서바이벌 게임 장면을 보면서는 먹던 시리얼을 코로 뿜을 뻔했다니까.
지금도 ‘사랑을 그대 품안에’를 생각하면 버터 느낌 가득한 미소를 날리며 웃는 차인표, 셔츠를 적당히 풀어헤친 채 격정적으로 케니 지의 음악을 색소폰으로 연주하던 차인표, 오토바이 타고 달리다 위기에 처한 진주를 구하러 몸을 날리던 차인표 등 내내 차인표의 모습만 기억에 남는다. 자고 일어나니 하룻밤 새 스타가 된 케이스라지만, 차인표의 하드캐리가 아니었다면 과연 이 드라마가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물론 작정하고 판타지를 보여주겠다는 장르에서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바람직한 시청자의 자세는 아니라 생각하고, 무엇보다 이 드라마가 무려 25년 전에 방영한 작품이란 걸 기억해야 한다. 어쨌든 ‘사랑을 그대 품안에’는 촌스러움을 벗어나 스타일을 추구하던 화려한 90년대의 정점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분명 의의가 있다.
경제 부흥기이던 그때, 모든 것을 구할 수 있는 화려한 백화점을 배경으로 사랑을 꽃피우고, 수영과 오토바이와 색소폰 같은 취미 생활을 즐기고,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에서 남녀 주인공이 키스를 나누며 엔딩을 맞는 드라마라니, 이보다 더 90년대를 잘 표현한 드라마가 또 있으랴.
드라마 속 서울백화점이었던 AK플라자 구로점(당시 애경백화점 구로점)이 오는 8월 말이면 폐점한다는 소식이 들려올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90년대의 영화(榮華)는 사라졌고,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도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다. 그래도 ‘사랑을 그대 품안에’는 차인표-신애라라는 연예계 대표 잉꼬부부를 탄생시킨 작품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게 분명하다. 아, ‘닐리리 라라라라’로 기억되는 주제가 ‘Nabillera’도 함께.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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