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허준’의 유명세를 일일이 설명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대한민국 역대 시청률 3위, 사극 드라마 중에서는 64.8%라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 타이틀롤 허준은 물론 예진아씨, 임오근, 홍춘 등 갖가지 매력의 조연들이 빛을 발한 드라마. 드라마의 인기로 한의학에 대한 관심은 물론 그해 한의학과 입학 경쟁률이 매우 높아졌다는 에피소드를 낳을 만큼 ‘허준’의 인기는 대단했다. 2000년 6월 종영한 드라마임에도, 허준을 맡은 전광렬이 어의 복장을 하고 2018년 자양강장제 CF에 나와 명대사를 읊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허준’은 사극 연출의 대가로 불리는 이병훈 PD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조선왕조 오백년’ 시리즈의 대부분을 연출하며 사극 전문임을 분명히 한 이병훈 PD는 ‘허준’을 기점으로 ‘상도’, ‘대장금’, ‘서동요’, ‘이산’, ‘동이’, ‘마의’, ‘옥중화’에 이르기까지, 자기만의 색깔이 분명한 사극을 만들었다.
그래서 다른 사극들을 보다가 이병훈 PD의 사극을 보면 그 분명한 특징들 때문에 단숨에 분간할 수 있다. 시청률이나 화제성 면에서도 중박 이상은 친다는 게 특징인데, 그중 ‘허준’과 ‘대장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줄을 서시오” “멈추시오” “홍춘이~”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같은 명대사들은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병훈 PD의 드라마 주인공들은 대부분 비범한 재능은 기본, 성실한 데다 인품마저 뛰어나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상황과 강직한 주인공의 성품이 충돌하며 여러 가지 고초를 겪게 되지만 결국 능력과 인품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악인은 몰락한다. 드라마 주인공에게 몰입이 되면 내 일처럼 흥분하고, 결말에 가서 ‘사이다’를 맛보고 싶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병훈 PD의 드라마는 너무나 흡족한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
이병훈의 사극세계가 사람들에게 통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인공이 대부분 보통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왕이나 왕실 사람들, 혹은 양반가의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양민 혹은 천민 출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그들이 재능과 노력으로 전문 분야에서 업을 이루는 과정을 그린다. ‘허준’의 허준도, ‘대장금’의 장금이도 출신 성분은 낮았지만 각자 노력하여 임금의 주치의인 어의가 되었고, 수라간 최고상궁과 어의녀가 되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보답을 받는다’는 공식은 성공을 꿈꾸며 오늘도 내달리는 보통 사람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전 사극들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직업을 정면으로 조명한 것도 특징이다. ‘허준’은 혜민서를 비롯해 궁궐 내의원에서 활동하는 의원들을 조명했고(오늘날의 의사, 한의사), ‘대장금’은 임금의 식사를 책임지는 수라간 상궁(셰프 중에서도 청와대 조리장급)과 의술을 책임지는 내의녀를 조명했다. 전문 분야를 조명하다 보니 자연 그 세계에서 주인공을 지원하고 이끌어주는 참스승이 등장한다. ‘허준’의 유의태와 ‘대장금’의 한상궁이 그 대표적 인물로, 재능과 노력은 있지만 어느 정도 부족한 부분이 있는제자들을 살신성인으로 가르친다(죽음을 앞둔 유의태는 허준에게 무려 자신의 몸을 해부용으로 내놓을 정도).
조금 비뚤어진 나는 이병훈 PD의 사극세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의 사극들이 대부분 스토리텔링이 뛰어나고 몰입도가 뛰어나 보기는 보되, 보고 나서 구시렁거리는 스타일이다. 아니, 허준의 라이벌이었던 유도지는 노력을 안 할 줄 알아? 장금이 못지않게 금영이도 피땀 흘리며 수련했다고! 이런 식으로. 게다가 주인공에게 결국 일과 사랑 모두 성공을 거두게 하고, 악역과 달리 주인공에게는 이끌어주는 훌륭한 조력자들은 물론 결정적인 순간 운마저 따라준다는 플롯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친구의 말에 따르면 인생을 삐딱하게 봐서 그렇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준’이 좋았던 건, 주인공 허준이 다른 이병훈 사극세계의 주인공들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양반의 얼자로 태어났기에 천민으로 살아야 했던 울분 때문에 밀수를 하는 왈짜패로 살았던 드라마 초반의 설정이라든가, 노재상의 부인을 치료한 공으로 받은 추천장을 스승 유의태가 찢어버렸을 때 울분하는 모습 등이 더없이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이라면 가끔 주어진 삶의 불평등에 원망도 하고, 정석보다 빠르게 갈 길이 있으면 그 길을 잡고 싶지 않나.
반면 ‘대장금’의 장금이는 허준보다 오지랖이 더 있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차라리 죽기 살기로 아등바등하는 최상궁이나 금영이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지더라고. ‘대장금’을 연기했던 배우들도 뛰어났지만 ‘허준’의 배우들에 눈길이 간 것도 한몫했다. 특히 유의태 역의 이순재. 허준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는 1976년 영화 ‘집념’, 1991년 ‘동의보감’, 1999년 ‘허준’ 그리고 2013년의 ‘구암 허준’까지 네 편이 존재하는데, 이순재는 ‘집념’에서 허준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동의보감’과 ‘허준’에서 내리 유의태 역을 맡아 눈길을 끌었다. 강퍅한 성정이지만 의술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 모습이 참 무섭다 싶으면서도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임오근 역의 임현식. “줄을 서시오”라는 명대사와 함께 특유의 애드리브를 선보인 임현식은 ‘대장금’에서도 대령숙수로 등장해 웃음을 주었으나 ‘허준’의 임오근 인기에는 못 미쳤다. 아, 임현식 외에도 이순재, 이희도, 맹상훈, 박정수, 견미리, 이숙 등 이병훈 사단이라 불릴 만큼 자주 등용되는 중장년 배우들이 있는데, 연기 구력이 있는 만큼 모두 톡톡히 제 몫을 하기에 편안하게 연기를 즐길 수 있는 것도 이병훈 사극의 장점이다.
지금 ‘허준’은 ‘MBC ON’에서 재방 중이고, ‘대장금’은 ‘CNTV’에서 재방 중인데, 보고 있다 보면 역시 내 호오와는 상관없이 마냥 보게 된다. 이병훈 PD의 연출작이 다시 나올까? 나온다면 또 어떤 인물, 어떤 직업군을 조명하려나. 그리고 난 또 구시렁거리면서 그걸 보고 있겠지.
필자 정수진은?
영화와 여행이 좋아 ‘무비위크’ ‘KTX매거진’ 등을 거쳤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유튜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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