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누구를 위한 인증인지 모르겠어요. 분명 간호사들만 독박 쓰는 제도를 없애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건 병원 인증평가가 아니라 간호사 인증평가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 중인 현직 간호사 A 씨의 말이다. ‘의료기관 인증제도’를 두고 간호사들 사이에서 불만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의료기관 인증은 정부가 환자 안전과 의료기관 서비스의 질을 평가하는 제도로 2011년부터 시행됐다. 의료법에 따라 상급종합병원과 전문병원, 요양병원 등은 4년에 한 번씩 반드시 인증을 받아야 한다. 그 외 병원급 의료기관은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최근 의료사고가 빈번해지며 국회에서는 이 제도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분위기. 지난 5월에는 ‘의료기관 인증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제도가 간호사들의 업무 부담을 갈수록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자, 지난 3월 보건복지부와 인증전담기관인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인증원)은 ‘인증제도 혁신안’을 발표했다. 다만 여전히 현장에서는 달라진 점을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 벼락 암기에 침구류 빨래까지…조사 앞둔 병원은 이직도 꺼린다
현직 간호사들의 말을 종합하면, 인증조사 기간 동안 간호사들은 ‘수험생’이 된다. 현직·전직 의사와 간호사들로 구성된 인증원 소속 조사위원들이 병원의 인증기준 충족 여부를 조사하러 나오기 전까지 ‘암기식 교육’에 시달린다는 얘기다. 가령 인증신청을 한 병원에서 인증원에서 발간하는 ‘인증기준 용어집’을 간호사들에게 달달 외우게 하고 ‘인증대비 암기시험’이 진행된다. 교육은 적게는 2주에서 길게는 몇 달간 이뤄진다.
얼마 전 인증조사를 거친 상급종합병원에서 근무 중인 간호사 B 씨는 “조사위원들이 와서 질문을 한다. 거기에 맞는 답을 해야 하니 병원에서 책자를 만들어주고 무작정 외우라고 한다. 교육도 들어야 하는데 지각이나 결석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쉬는 날에도 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법으로 규정된 근무 시간은 자연스럽게 초과한다. 특히 조사위원들이 병원 현지평가를 벌이는 나흘간은 퇴근을 못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더 큰 문제는 간호사들이 업무 영역과 무관한 ‘잡일’까지 도맡아 한다는 점이다. ‘환경관리를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인증원의 조사가 이뤄지다 보니 간호사들이 침구류나 커튼까지 본인의 집에서 세탁해오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인력이 부족한 중소형 병원에서 자주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초과 근로에 대해 수당이 지급되는 사례는 드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떤 병원이 인증을 조만간 거친다는 소문이 퍼지면 해당 병원 이직을 기피하는 현상까지도 벌어진다. 간호사는 이직이 활발한 업종인데 인증평가를 목전에 둔 병원에 지원은 기피하는 것. 지난해 전국보건의료노동조합이 의료기관 근로자 2만 96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간호사의 71.5%가 의료기관 인증제로 인해 휴직이나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의사가 아닌 간호사들에게 의료기관 인증제도의 책임이 떠넘겨지는 이유에 대해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아무래도 병원 내에 간호사의 수가 많아서 그런 것 같다. 간호사들은 어디서든 볼 수 있지 않느냐. 조사에 나와도 의사에게 해야 할 질문을 간호사에게 물어본다”며 “의사들은 조사위원들이 물어볼 게 있다며 만나자고 해도 수술이 있다면서 만나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 제도 보완돼도 조사위원 태도 바뀌지 않으면 유명무실
지난 3월 발표된 인증제도 혁신안에는 △중소병원 인증 참여 활성화를 위한 ‘입문인증제도’ 도입 및 지원 △인증제도 활성화를 위한 ‘인센티브’ 확대 △인증 신뢰도 향상을 위한 조사 전문성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또 조사위원들이 의료기관을 평가하는 기준이 완화돼 일각에서는 간호사들이 용어집을 외우거나 직접 청소를 하는 현상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다만 현장에서 여전히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 대표적인 이유로는 ‘조사위원들의 태도’가 거론된다. 보건의료노조 관계자는 “‘조사위원 갑질’이라는 말이 있다. 조사위원이 부드럽게 조사를 해도 병원 입장에서는 긴장이 되는데 위원들이 권위적이고 강압적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부분이 있다”며 “아무리 기준이 완화됐다고 해도 조사위원이 ‘그거 하나를 못 외우고 보고 답하느냐’고 말한다면 그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고 밝혔다.
그러나 관계자들은 의료기관 평가인증제도를 아예 없앨 수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환자안전 문제와 의료서비스 질적인 부분을 고려했을 때, 이를 평가할 제도는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를 유지하되 간호사들의 업무 부담을 줄이는 방식으로 제도를 계속해서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김혜림 전국보건의료노동조합 정책국장은 “인증제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반짝 인증평가’에 그치고 있다. 간호사들이 공짜 노동을 하고 있다고도 얘기할 수 있다. 평상시에도 간호 인력이나 환경을 정비하는 인력을 늘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지금은 인증평가를 4년에 한 번만 하면 되는 시스템이다. 정말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제도를 마련하고 싶다면 불시에 병원을 검증하는 등의 또 다른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지적을 두고 인증원 관계자는 “간호사들의 추가 업무에 대한 부분들은 인증원에서 파악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혁신안을 마련하고 기준을 완화했지만, 의료기관 쪽에서 좀 더 대응을 하고 정리를 해줘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인증원에서도 관련 부서에 다시 검토를 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겠다”며 “조사위원들에게도 올해 4월부터 교육전담부서를 신설해서 교육을 강화하도록 하고 있다. 조사위원들의 갑질에 대해서 지적을 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 내용을 취합해 검토해 개선해나가려고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담당 부서인 보건복지부 의료기관정책과 관계자는 “조사위원들의 역량 차이도 있고 불필요한 질문을 많이 하는 것에 대해 지적이 있어 조사위원 교육을 강화했다. 하지만 병원이 인증을 잘 받으려고 무리하게 준비하다 보니 일부 병원에서 그런 현상이 아직 나타나는 것 같다. 또 인증평가를 처음 받은 병원은 과거에 받은 적이 없으니 차이점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며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완벽하게 개선됐다고 할 수는 없다. 앞으로는 인증원 직원도 교육시킨 후 조사위원과 함께 동행하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각 병원에서 조사위원들에 대한 피드백을 자발적으로 보내주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김명선 기자
line23@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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