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국에서 세계응급의학회가 열렸다. 당직 시간을 제외하곤 나흘 내내 학회장에서 잡일을 해가며 각국 응급의학과 의사들의 강연을 들었다. 세상에, 하나같이 끔찍하게 재미있었다. 모든 강연이 제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역시 직접 하지 않고 남이 해놓은 연구나 발표를 듣기만 하면 이렇게 재미있다.
그 중 기대했던 강연이 있었다. 방대한 일정표에서 일찌감치 점찍어둔 것이기도 했다. 주제는 ‘온열 질환’이라는 평범한 것이었는데, 발표자의 근무지는 무려 UAE(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였다. 아랍에미리트와 열사병이라. 지난해 갑자기 한국에 폭증한 열사병의 실태를 마주하고 알렸다가, ‘열사병의 열사’라는 예기치 못한 별칭까지 얻었다(관련기사 [응급실에서] 지금 중환구역이 열사병 환자로 터져나갑니다).
생각하면 자다가도 무회전이불킥을 시전할 별칭이다. 하여간 공익적 의미가 있으니, 올해 여름과 재난으로 격상된 폭염에 대비해서 이런저런 언론 작업도 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마침 정말 ‘열사의 땅’ 아부다비에서 직접 열사병을 진료하는 의사에게 관련 이야기를 들을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 강연은 폐회식 직전 맨 마지막 세션에 있었다. 마흔 명이 넘어가지 않는 소강연장이었다. 기대감에 가득 찬 나는 같은 세션의 캐나다 의사가 “우리나라는 날씨가 추워서 강물에 빠져 익사한 사람도 꽁꽁 얼어 있어요. 바로 우리 병원 앞에 있는 이 강입니다(꽁꽁 언 강의 사진을 보여준다). 이 유발된 저체온은 간혹 신경계 손상의 보호로 이어지는데…”라고 하던 앞 강연과, 미국 의사의 “쓰나미, 지진, 허리케인, 가뭄 등의 글로벌 자연재해로 강제 이주하는 인구가 약 육천오백삼십만 명이며 10조 달러의 경제적 손실과 세계 의학 시장의 재창조가…”라고 하던 그다음 강연을 들으며 기다렸다. 드디어 고대하던 ‘열사의 땅에서 온 열사병의 열사’는 세계응급의학회의 마지막 강연으로 연단에 섰다.
유사 이래 극도로 더운 기후가 지속되는 나라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 의학적 발전을 이룩했을 때 열사병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했다. 그 역사와 기록, 발생 통계와 사례, 현재 열사병과 일선에서 맞서 싸우는 의사들의 최신 지견과 재난의 대비 상황을 듣고 전문적인 치료 시설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일선에서도 적용하고, 언론에 알릴 것이 있을까도 싶었다. 아부다비에서 날아와 열사병 강연을 맡은 사람이면 그 정도는 준비해 왔을 법했다. 절대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연단에 선 그는 기대와 약간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 그가 아랍계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전형적인 코카시안(백인)이었다. ‘아랍에서 일하는 의사가 꼭 아랍계일 필요는 없지’라고 생각했다. 그 코카시안은 자신을 소개했다. 너무 전형적인 미국식 영어였다. 말하는 게 그냥 미국인 같았다. 다시 다짐했다. 중동에서 열사병과 맞서 싸우는 열사가 미국에서 날아왔어도 상관없지. 환자 열심히 보고 구조적으로 이해해 강의만 잘한다면 그게 다 상관은 없지.
20분 남짓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는 열사병의 정의와 진단과 치료 방법 등을 하나하나 설명해갔다. “아이와 노인과 음주자가 고위험군이니 예방에 각별히 주의하고, 발생 시 환자의 체온을 즉시 낮추어야 하며, 뒤늦게 의식이 소실될 수 있으니 주의 깊게 살펴야 하고, 과한 냉각으로 인한 저체온은 피해야 한다”는 등등을 나열했다. 원론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문득 강연이 끝나버렸다. 끝.
그가 강연한 내용은 내가 이미 다 아는 것이었고, 대체로 교과서에 쓰여 있어 누구든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그가 마흔 명을 모아놓고, 학계에 새로운 열사병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빠진 것이 있었다. 열사병으로 고통받는 아부다비의 현실과 치료 노하우와 보건의료적 관점에서의 접근이었다. 그 전쟁터를 기술하지 않고 강연이 끝나버린 것이었다. 심지어 해외 학회에 들고 올 법한 흔한 사진이나 케이스 하나 없었다.
정적이 흘렀다. 너무 무난한 강연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아부다비 이야기는 어디 있는가. 나는 참다못해 발언대로 나가 아부다비의 열사병 실태에 대해 질문하려고 했다. 순간 좌장이 마이크를 잡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물었다.
“그런데 아부다비에서 진료하고 계신 것 맞지요? 그 동네 열사병은 어떤가요.”
그 미국계 연사는 매우 솔직하게 답했다.
“제 담당 환자들은 전부 에어컨 있는 집에서 살아서요. 가끔 애들이 약간의 탈수 증세를 보이는 정도입니다.”
그렇다. 그는 ‘열사병의 열사’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UAE에서 미국 응급의학과 의사를 고용했는데, 인도네시아나 필리핀 노동자를 진료하게 시켰겠는가. UAE는 신분과 계층이 어느 나라보다 명확하다. 그는 바깥에 나갈 일 없는 사회적 계층이 높은 환자만 진료하고, 결국 강연에서는 역설적으로 원론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짜 ‘열사병의 열사’는 지금도 아부다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폐회식장으로 향하며 생각했다. 결국은 역설도 이야기해주는 것이 있다. 아부다비의 미국인 의사는 결국 열사병이 사회경제적인 측면이 매우 크게 작용하는 질환임을 자신의 존재로 보였다. 그것은 그가 평소 기온이 섭씨 40도가 우습게 넘어가는 아부다비 응급실에 근무하고 있지만, 막상 열사병 케이스를 직접 보지 않음으로 증명한 것이다.
내가 본 것은 수면 위의 오리였다. 안전한 자들은 달의 앞면처럼 영원히 안전하고, 고통은 내가 듣지 못한 곳에서 행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는 역설의 참증명이라고 할까. 역증명도 증명이라는 것일까. 하지만 ‘참, 묘한 강의였어. 뭐랄까, 알맹이가 없는 것이 알맹이라니, 참 묘한 시간을 보냈군’이라는 생각이 폐회식 자리까지 떠나지 않았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 ‘지독한 하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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