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일종의 쇼(show)죠. 약국 조제실을 오픈 주방처럼 만들자는 말인데, 과연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조제실을 개방해서 소비자들이 안전한 약을 처방받게 한다는 말은 이해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가 않아요.”
지난 12일 오후 서울 성동구에서 13년째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A 씨는 목소리를 높였다.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게 흰 커튼으로 가려진 조제실에서 약품을 정리하던 그는 “투명한 조제실이 만들어져도 사람들이 ‘안전하게 약 만들고 있겠지’ 하는 느낌만 얻는 데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건물에서 다른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B 씨도 “현실과 맞지가 않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라”면서 “노코멘트다. 의견을 밝히기가 싫다”며 말을 아꼈다. B 씨가 운영하는 약국 역시 소비자들이 밖에서 조제실을 들여다볼 수 없는 구조다.
조만간 정부가 ‘약국 조제실 투명화’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약사들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 2월 국민권익위원회가 소비자들이 약품의 조제 과정을 볼 수 있도록 개방형 조제실을 의무 도입해야 한다고 권고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3월부터 17개 시·도의 시·군·구를 임의로 선정해 지역 내 모든 약국의 조제실 현황을 조사한 결과를 취합 중이다. 각 약국이 자율적으로 조제실을 개방하도록 권고한 후, 향후 강제성을 부여하는 방안이 가장 유력하다.
약국 조제실을 투명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이유는 약사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 문제와 연관이 있다. 약사가 아닌 무자격자가 약을 조제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데다, 약사가 약을 빼먹거나 잘못 처방하는 일이 간혹 발생하기 때문. 실제로 여러 ‘맘카페’에는 “조제실에서 약무보조를 할 경력직을 구한다”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물론 약사가 아닌 직원은 약을 직접 조제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 그러나 그동안 일부 약국에서 무자격자가 암암리에 약을 조제하다가 여러 차례 적발이 됐다.
# “비용 대비 효과 떨어질 것”
권익위와 소비자단체들은 의약품 조제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간접적 원인으로 ‘폐쇄형’ 조제실을 지목한다. 현행 약사법은 약국을 개설할 때는 조제실을 반드시 설치하도록 하지만, 조제실의 시설 기준은 따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약사들은 약국 조제실을 개방하는 방안이 ‘정답’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조제실을 투명하게 할 경우 약국 구조를 모두 바꿔야 해 적잖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규모가 작은 약국은 약품을 놓아둘 곳이 없어 조제실을 구분해서라도 벽을 만들어야 하는 실정인데, 조제실을 개방하면 그 벽마저 없어져 약품을 놓아둘 공간을 새로 마련해야 한다.
약사 A 씨는 “비용 대비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다. 조제실을 개방해도 이 약이 어느 환자의 약인지조차 알기 힘들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유심히 관찰하려고 하지도 않을 거다”며 “정부가 약국 조제실 인테리어비를 준다고 가정하면 조제실을 개방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쓸모없는 비용’이 될 게 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전 국민이 조제실 개방을 원하면 ‘개방하지 말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소비자들이 개방된 조제실이 있는 약국에만 찾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제실을 투명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가 빗발치는 상황도 아니다”고 덧붙였다.
맞은편 상가에서 약국을 운영한 지 1년 2개월 됐다는 약사 C 씨는 약 제조 환경을 모두 바꿔야만 실질적으로 ‘투명한 약 제조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요즘 약국에는 자동조제기가 설치돼 있고, 이 기계를 통해 약이 만들어진다. 주변 병원에서 자주 처방되는 약을 기계에 넣어두고, 이외의 약이 처방돼야 하는 경우에만 약사가 직접 조제한다.
그런데 이 기계도 밖에서 제대로 살펴볼 수 없는 불투명한 구조로 돼 있어 조제실을 공개한다고 해도 결국 보여줄 방법이 마땅치 않다. C 씨는 “약사가 아닌 종업원들이 조제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어느 정도 조제실을 투명하게 하는 것도 아주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모든 사람이 약 제조 과정을 완벽히 볼 수 있을 정도의 시스템을 갖추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약사에 대한 환자들의 불신이 커질 것이라 우려하는 약사도 있었다. 5개월 전부터 노원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D 씨는 유리창으로 된 ‘개방형 조제실’을 갖춰놓고 있다. 그러나 D 씨는 “조제실에 약이 많아서 약사들이 머뭇거릴 때가 있다. 한번은 내가 주저하고 있으니 환자가 ‘약이 없냐’며 불안해했다”며 “약을 주는 행위도 치료 행위에 들어가는데, 이런 모습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 위생 점검 강화, 조제보조원 제도 대안
조제실 개방을 둘러싸고 소비자단체와 약사회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 합의점을 도출해내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약국의 환경적인 여건이 먼저 개선돼야 한다”며 “약사가 아닌 사람이 약을 짓는 특정한 경우를 일반화해서 보면 안 된다. 수술실 CCTV 설치 등 사회적으로 더욱 문제되는 부분을 해결하는 게 먼저다”고 말했다.
반면 박순장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소비자감시팀장은 “은폐된 공간보다는 개방된 공간에서 조제하고 또 그것을 직접 보는 게 소비자 입장에서 훨씬 좋다. 소비자의 주권과 권리를 위해서 조제실 개방에 강제성을 부여하는 것보다는 약국 스스로 조제실을 개방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약국 조제실 공개 대신 더 현실적이며 효과적인 방안을 찾아야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는 조제실을 개방할지 말지의 논의에만 머무르고 있을 뿐, 어떻게 약사의 신뢰를 높이고 조제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수를 줄일지, 또 약국 위생은 어떻게 관리할지 등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구체적인 대안으로 보건소에서 약국 위생 점검 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현재 보건소는 약이 제대로 구비돼 있는지 등을 점검할 뿐, 위생 검사는 따로 하지 않는다. 아울러 무자격자의 약 조제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약사 A 씨는 “무자격자가 약을 조제하다 걸렸을 때는 그 약국 약사의 면허를 취소하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했다. 현행법에 따르면 약사가 아닌 사람이 약을 지으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테크니션(보조 조제원)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현재 약사가 아닌 약국에서 근무하는 종업원은 약을 배치하거나 약병을 정리하는 등 잡일을 도맡는데, 오히려 이런 종업원들이 약을 지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사회적으로는 약사가 약을 만드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약사들은 ‘소비자들이 약을 안전하게 먹을 수 있게 제대로 복약지도를 하고 처방을 내리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사실 약을 조제하는 기술은 전문적인 기술이 아니다. 약대에서도 배우지 않는다. 오히려 테크니션은 단순 기술인 약을 조제하고, 약사는 복약지도를 하고 처방전을 꼼꼼히 살피는 역할을 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의견을 밝혔다.
김명선 기자
line23@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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