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4일 발생한 ‘고속도로 역주행 사고’, 지난 4월 경남 진주 아파트 방화·살인사건, 지난해 12월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교수 사망 사건의 공통점은 모두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범죄라는 점이다. 조현병 환자에 의한 범죄가 잇따르자 정부와 국회에서는 본격적인 대책 마련에 한창이다. 그러나 정신건강의학 전문가들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 후속 대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표한다. 무엇보다 조현병 환자들에 대한 조기 치료 체계를 구축하는 게 급선무인데, 정작 이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조현병은 망상, 환청 등의 증상과 더불어 사회적 기능에 장애를 일으킬 수 있는 질환이다. 정신분열병이라는 병명이 사회적인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에서 2011년에 개명됐다. 보통 조현병 환자는 전 세계적으로 인구의 1% 정도에서 일정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 국내 조현병 환자 수 역시 50만 명으로 추정된다. 다만 조현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그리 높지 않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7년 기준 ‘F20(정신분열병)’ 질병코드로 사망한 사람은 42명이었다. 10만 명당 사망률로 따지면 0.1%에 불과하다.
조현병은 조기 진단에 의한 선제적 치료가 무엇보다 중요한 질환이다. 조현병은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때 발병하는데, 증상이 분명하게 발현되기 전 발병 초기에 치료하면 완치 가능성이 높다. 조기 치료는 병이 생기고 난 이후 치료를 받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거나, 발병하기 전 미리 예방하는 조치를 포함한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 국내 조현병 환자 수는 50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실제 진료를 받은 사람은 터무니없이 적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17년 기준 10만 7662명이 조현병 질환으로 진료를 받았다. 2012년 10만 980명에 비해 7% 증가했지만, 여전히 40만 명 정도가 치료를 받지 못하는 셈이다.
# 조현병 사고 날수록 환자들이 더욱 병원 멀리하는 ‘악순환’
국내 조현병 환자들의 조기치료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우선 초기에 조현병 증상을 보이거나 조현병이 발병할 소지가 높은 사람들을 미리 선별해 치료하는 체계가 마련돼 있지 않다. 따라서 환자 본인과 가족이 자발적으로 증상을 인지하고 병원을 찾지 않으면 치료할 방법이 마땅히 없는 상황. 하지만 조현병 환자들은 초기에는 우울증 증세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병원을 잘 찾아가지 않는다.
백종우 경희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조현병 환자들의 조기 치료에 대한 책임을 환자 본인과 가족들에게 돌린다. 특히 2017년에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으로 탈원화(병원을 떠나 지역에서 돌본다는 뜻)가 중요해지면서 가족과 환자의 부담만 더욱 커졌다”며 “초기에는 증상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아 치료하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흐른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점점 망상이나 환청이 심해져 만성화된다”고 설명했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도 조현병 환자들의 조기 치료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소속한 집단에서 ‘잠재적 범죄자’ 혹은 ‘사회 부적응자’로 간주하다 보니, 환자들이 외래 진료와 입원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방지현 한국정신장애연대 간사는 “국내에서는 조현병 환자들로 인한 범죄가 발생하면 순간적으로 이슈는 되지만 오히려 (조현병 환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커져 더욱 병원 방문을 꺼리게 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도 지난 5월 ‘중증정신질환자 보호·재활 지원을 위한 우선 조치 방안’을 발표하며 조기 치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대책의 실효성이 떨어져 조기 치료 체계를 구축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번 대책의 골자는 정신건강복지센터 인력을 늘려 조현병 환자들의 재활 지원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 병이 많이 진행된 만성적인 조현병 환자들에만 해당된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발병 초기 환자를 정신건강복지센터에 등록해 지속해서 치료를 지원하는 조기중재지원 사업을 도입한다고 밝혔지만, 조현병 초기 환자들이 센터에 가는 경우는 극히 적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회의원들도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앞다투어 내놓았다. 그러나 이들 법률안에는 정신재활시설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거나,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입힐 가능성이 큰 정신질환자의 행정입원을 좀 더 쉽게 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최근 발의된 안 중 조기 치료와 관련된 안은 ‘아동과 청소년의 조현병 치료 골든타임을 놓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들에게 특화된 정신건강증진의료기관을 국가와 지자체가 지역별로 설치·운영하는 법안’이 유일했다.
# 조기 치료 가능한 적극적 공공 시스템 구축 필요
전문가들은 해외 제도를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조현병은 초기에 발견해 치료하면 완치 가능성이 높은 만큼,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가령 서구 선진국들은 조현병이 발병할 소지가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을 미리 선별한다. 진행 정도에 따라 암을 1기, 2기, 3기로 나누듯, 해외에서는 조현병과 같은 정신질환도 병기를 구분해 그에 따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권준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는 “해외에서는 조현병 환자들과 관련한 공공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 호주나 영국은 조현병으로 진단받지 않았지만 우울증 증상을 보이는 청소년들에게도 상담한 후 약을 복용하게 하는 시스템이 있다”며 “우리나라는 외래치료지원제를 시행 중이지만 초기 환자들은 병을 조기에 발견하기 어려울뿐더러 발견됐다고 해도 병원에 안 간다. 더 적극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백종우 교수도 “뉴질랜드는 지역사회에 정신건강위원회가 있다. 누구든지 치료가 필요한 것 같다거나 조현병이 발병할 위험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신청하면 위원회에서 환자를 부른다. 그러면 이후 환자에게 (조기 치료에 관한) 정보를 주고 치료를 받도록 설득하거나, 입원을 하게 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진다”며 “해외에서는 치료가 인권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체계가 마련돼 있다”고 설명했다.
조기치료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신뢰할 만한 공적 기관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를 위해 관련 예산을 확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2019년 보건예산 중 정신건강복지예산의 비중은 1.5% 수준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1년 기준 68개국의 보건예산 중 정신보건예산 비중 평균은 2.82%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현재는 조현병 환자와 관련된 사건사고가 생길 때만 대응적 차원에서 대책이 급조되곤 한다”며 “조현병 환자의 치료와 보호를 위한 기본적 사회안전망으로서의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김명선 기자
line23@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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