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해 9월 말, 부다페스트에 갔다. 베를린에 거주하는 동안 한 번쯤은 헝가리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버킷리스트 우선순위에 있는 건 아니었다. 야경이 아름답다고 하니, 동유럽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하니, 어쩌다 기회가 되면 한번 가봐도 좋겠다고, 그 정도까지만 생각했다.
급하게 2박 3일 정도의 여유가 생긴 우리 가족은 여러 나라와 도시를 고민하다 부다페스트로 결정했다. 그즈음 만난 많은 사람들이 강력하게 부다페스트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베를린에서 비행기로 1시간 4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기도 했고, 그렇게 여러 명이 ‘꼭 가보라’고 입을 모으는 걸 보면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을의 부다페스트는 추웠다. 베를린보다 남쪽인데도 더 스산하게 느껴졌다. ‘체코, 폴란드와는 또 다른 동유럽의 정취가 이런 것인가’ 싶은 헝가리 특유의 분위기를 느끼며 도시 곳곳을 걸었다. 다뉴브 강변은 부다페스트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강을 경계로 언덕 위 ‘부다’ 지구와 낮은 지대의 ‘페스트’ 지구로 문화의 경계가 나뉘는 것도 흥미로웠다. 부다와 페스트가 별개의 도시에서 19세가 후반 하나의 도시로 합병됐다는 것이나 높은 지대에 위치한 부다 지구는 귀족과 부자들의 영역이요, 페스트는 서민들의 영역이었다는 점 등을 알고 다뉴브 강 주변을 여행하다 보니 어느새 도시의 매력에 물들고 있었다.
역사적 배경에서 유추되듯 부다 지구에는 마챠시 교회며 어부의 요새, 부다 왕궁 등 단순히 유적지라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 많았다. 어부의 요새는 명물 중 명물이었다. 어부들이 강을 건너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어부의 요새는 흰색의 뾰족하게 솟은 7개의 고깔 모양 탑이 길게 늘어선 건축물로 건축 그 자체도 아름답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다뉴브 강과 페스트 지구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짧은 부다페스트 여행 중 가장 긴 시간을 어부의 요새에서 보냈다. 늦은 오후, 부다 지구와 페스트 지구를 잇는 세체니 다리를 건너 어부의 요새에 오른 우리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하늘이 여러 빛깔로 물들고, 어둠이 내려앉고, 강 건너 페스트 지구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이 황금색으로 빛이 날 때까지 몇 시간을 보낸 후에야 내려왔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부다페스트의 마법에 취한 건 비단 우리만이 아니었다. 여러 나라에서 왔을 관광객들 모두 황홀경에 빠져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눈에 먼저 띄는 건 한국인 관광객들이었다. 주로 20~30대 젊은 층이었고, 엄마와 딸 등 가족 단위도 보였는데, 그들 모두 아름다운 광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고 성벽을 따라 걸으며 행복에 젖어 있었다. 젊은 여행객들의 트렌드를 오롯이 보여주듯, 현지 스냅사진 촬영 작가를 동원한 채 ‘인생샷’을 촬영 중인 나 홀로 관광객들도 적지 않았다.
2박 중 둘째 날은 유람선을 타기로 했다. 전날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봤던 야경도 감동이었지만, 유람선 야경 투어는 부다페스트 여행에서 ‘필수 코스’로 거론되니 의무감마저 들었다. 해질녘 투어를 시작해 깜깜해진 뒤 번쩍거리는 야경을 보는 게 ‘진짜’라고들 했지만, 추운 날씨에 감기 기운이 있던 아들을 고려해 늦은 오후 시작해 해질 무렵 끝나는 시간대를 골랐다.
페스트 지구 쪽에 늘어선 유람선 선착장. 미리 표를 발권하기 위해 선착장을 찾은 우리는 다른 배들에 비해 큰 편이고 가격은 비슷한 유람선에서 티켓을 구매했다. 바로 옆 선착장, 훨씬 작은 크기의 배에 중국인으로 보이는 단체 관광객이 탑승하는 것을 보면서 의아했다. 같은 가격인데 왜 작은 배를 탈까.
그런데 탑승 시간에 맞춰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티켓을 확인한 직원은 유람선의 후미 쪽으로 안내하더니, 우리가 탑승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그 배의 바로 뒤에 정박해 있던 3분의 1 혹은 4분의 1 정도 되는 사이즈의 작은 배에 타라고 했다. 호객 행위에 속은 듯해 찝찝했지만, 같은 배인지를 확인하지 않은 우리의 잘못도 없다고 할 순 없었다. 게다가 모두들 아무렇지 않게 그 배에 탑승하고 있었으니 그제야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탑승객들은 야외 좌석을 택해 위층으로 올라갔지만 우리는 아이의 몸 상태를 고려해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선실 안에는 젊은 여승무원이 매점을 지키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구명조끼가 어디 있는지부터 둘러봤다. 선실 벽에 ‘보란 듯이’ 튜브가 걸려 있었지만 구명조끼는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좌석 아래 안쪽에서 구명조끼로 추측되는 물건을 보았고, ‘안전’을 고려한 우리의 노력은 끝났다. 설마 무슨 일이 있으랴 싶은 생각, 설령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강폭이 작았고, 수많은 유람선들이 오가고, 도시에 인접한 상황이라 걱정할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 안 되는 그 사고가 벌어졌다. 작은 배를 타면서 불안했던 그때의 우리가 생각났다. 다뉴브강에는 여러 척의 배들이 다녔는데, 내 기억에 대부분의 관광객은 작은 유람선에 승선하고 있었다. 레스토랑과 숙박 시설 등을 갖춘 듯한 큰 크루즈선은 탑승 비용이 30~50유로(4만~6만 7000원)에 달했으니, 어떤 관광객이 1시간 남짓 야경 투어에 그 비용을 쓰랴.
한국에서 접했더라도 놀란 가슴은 마찬가지였겠지만, 지난해 가을 다녀온 그곳에서 일어난 끔찍한 참사를 바라보는 심경은 슬픔을 넘어 충격적이기만 하다. 부다페스트에서 마주쳤던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의 마냥 행복에 찬 표정들, 그들과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좋은 여행 되세요”라고 인사하며 헤어지던 순간들이 생생하다.
한국 관광객들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 같다고 여기서 한인 민박집이나 한식집을 하면 잘되겠다고 남편과 주고받았던 농담들이 생생한 지금, 더 이상 부다페스트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떠올리기 힘들어졌다. 여행 내내 컨디션이 나빴던 탓에 부다페스트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은 아이를 위해 언젠가 한 번 더 가고 싶다던 마음도 이제는 저 멀리.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2017년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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