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더 이상 길 위에서 영혼(Spirit)을 공유하지 못하는 기분이야. 순례자가 아니라 완전 관광객이라니까. 예의 없이 큰 소리로 떠들고, 빵빵거리는 자전거 순례자들은 또 어떻고!”
걷기 시작한 지 어느덧 28일째, 사리아(Sarria)를 지나 포르토마린(Portomarin)으로 향하는 숲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함께 걷던 아나리사는 실망을 가득 담아 불만을 터뜨렸다. 갓 스무살 넘은 그녀는 이탈리아 투스카니주 출신인데, 비박으로 순례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실제론 이틀 비박, 하루 알베르게를 이용하는 식이었다.
“맞아, 나도 동의해. 느낌이 많이 달라졌어. 갈리시아 지방은 정겹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오히려 실망스럽네.”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사리아는 순례길을 맛보고 싶은 단기 순례자가 걷기 시작하는 마을이다. 사리아는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부터 100km 떨어진 마을인데, 100km 이상 순례길을 걸으면 증명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거나 800km를 걷기엔 체력이 부담스러운 사람이 택하는 코스다. 형광색 조끼를 맞춰 입은 중년의 단체 ‘순례객’도 보이고 가족 단위도 늘어난다. 대학 입학원서에 자신의 ‘체험’을 한 줄 넣고 싶은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오기도 한단다.
“조심해!”
걷던 중에 아나리사가 급히 가방 끈을 끌어당겼다. 자전거 순례자에게 부딪힐 뻔한 순간이었다. 사리아를 지나자 분위기가 급속도로 달라졌다. 자전거 순례자들은 도보 순례자에게 경적을 울려댔다. 그 전에도 없던 일은 아니었지만, 경적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아나리사는 모두가 짜증스러운 상황에서 서로를 향한 ‘경외심(Respect)’을 잃었다고 표현했다. 리사는 순례자(Pilgrim)를 관광객(Tourist)과 합쳐 ‘순례 관광객(Pilgrimist)’이라고 불렀다.
사리아를 지나니 일단 길 위에 순례자가 빡빡해졌다.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단체 손님’도 많아지는데, 발산하는 에너지가 오래 걸은 순례자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 에너지를 마주하고 보면 당류를 끊었다가 갑자기 진한 다크 초콜릿을 먹는 기분이었다. 토론 끝에 순례객들은 오래 걸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에너지를 짧고 크게 쓰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순례가 옳고 더 고귀하다고 주장할 순 없지만, 하나 아쉬운 건 사리아를 지나면 “부엔 카미노(좋은 길 되세요)”라고 인사하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든다는 거였다. 700km를 걷는 동안 입에 달고 지냈던 그 인사가 100km 지점에서 걷기 시작한 사람에겐 부담스러운 듯했다.
아쉬운 마음을 가득 품고 걷다 보니 ‘100km 비석’이 나왔다. 여기서부터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는 100km. 비석은 산 중턱 마을에 시시하게 세워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순례자는 이 비석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사진도 찍고, 낙서도 하고, 노란 리본을 남기는 등 자기만의 표식을 한다.
“리사, 이제 100km 남았어. 걷는 내내 언제 끝나나 생각했는데, 막상 100km밖에 안 남았다니까 아쉽네.”
이탈리아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서면 작은 비석이 남은 거리를 알려준다. 비석은 보통 500m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그 전에도 지금도 ‘언제쯤 끝날까’라는 눈빛으로 거리를 확인했지만, 그 둘의 마음은 백팔십도 달랐다. 거리가 줄어든 걸 확인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빨라져 있는 걸음을 의식적으로 늦췄다.
아나리사와 700km 순례길을 정리하듯 서로에게 핑퐁 질문을 시작했다.
“700km를 걸었잖아. 뭐가 가장 기억에 남아?”
아나리사가 물었다. 어려운 질문이었다. 기억 남는 사람도, 기억 남는 말도, 기억 남는 장소도 수두룩했다.
“야, 너무 어려운 질문이잖아. 좁혀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이탈리아 커플이었다. 남자는 클라이드, 여자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이었다. 둘은 애초에 알던 사이는 아니었고 순례길에 와서 눈 맞은 커플이었다. 그 둘과 3일 정도를 함께 걸었다. 엘리자베스는 영국에서 일하다가 이탈리아로 돌아갈 결심을 한 뒤 순례길을 왔다고 했다. 이탈리아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젊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유럽 다른 국가로 나가는 상황에서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라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향수병이 심했고,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자기를 소개했는데, 사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된다고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생각을 정리하려고 순례길에 왔다고. 그래서 생각을 정리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이 있다.
“사실 생각을 정리하러 왔는데, 걷다 보니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그게 정말 아름다운(beautiful) 것 같아. 가장 마음에 들어.”
답을 듣던 아나리사가 “왜 그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아? 그건 회피 아냐?”라고 물었을 때, “나도 모르겠어. 그냥(Just)”이라고 답을 흐렸다. 지금 그녀가 다시 그 질문을 하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답 없을 만큼 엎질러진 방을 청소할 때, 일단 모든 물건을 다 한 곳에 몰아넣은 뒤에 재정리해야 해. 그렇지 않고는 정리가 안 되거든. 마찬가지로 생각을 정리할 땐 한 번 비우고 다시 채워넣어야 하는 거 아닐까. ‘회피’가 아니라 ‘청소’쯤으로 해두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계속됐다. 아나리사의 걸음은 빨랐다. 오후 2시쯤 포르토마린에 도착했다. 사모스에서 시작해 6시간 만에 37km를 걸었다. 가방을 풀고 헉헉대고 있으니 아나리사가 씨익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점심도 먹지 않은 우리는 곧장 카페로 향했다. 순례자메뉴를 시킨 뒤 와인을 한잔했다.
“리사야, 너 왜 이렇게 빨리 걸어. 이 길은 천천히 걸어야 하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내가 걷고 싶은 방식으로 걷는 거지.”
그렇지. 그것도 너의 카미노지.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먼 산으로 시선을 옮겼다. 강바람이 솔솔 불었다. 포르토마린은 강가에 형성된 마을로, 언덕에 자리를 잡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목적지까지 96.5km, 걸음으론 3일 걸리는 거리였다. 한 달간의 여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박현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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