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해파리는 참 특이한 동물이다. 눈도 지느러미도 없다. 바다에 떠다니는 비닐봉지처럼 물살에 몸을 의지한 채 부유할 뿐이다. 수족관에서 무념무상 한 듯 두둥실 떠다니는 해파리들의 모습은 참 오묘하다.
저 멀리 어두운 우주에도 거대한 해파리들이 기다란 촉수를 뒤로 늘어뜨리며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우주는 하나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수족관이다. 수족관 곳곳에 다양한 물고기들이 살고 있듯 거대한 우주 곳곳에도 다양한 은하들이 서식하고 있다.
가끔씩 바다 속에서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은하들도 서로 중력에 이끌려 한데 모여 있는 지역이 있다. 은하들 여러 개가 모여 있는 이런 지역을 은하단(Galaxy cluster)이라고 한다.
그런데 은하단에는 별들의 무리인 은하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은하단 속 은하와 은하 사이 공간은 텅 빈 게 아니라 엄청난 양의 가스 물질로 채워져 있다. 이런 가스 물질을 은하단 내 물질(ICM, Intra-Cluster Medium)이라고 한다. 은하단의 중심으로 갈수록 중력이 더 강해진다. 따라서 은하단 외곽에는 ICM이 낮은 밀도로 퍼져 있지만 은하단 중심부로 들어가면 훨씬 높은 밀도와 온도로 ICM이 채워져 있다.
어떤 물체가 흐르는 유체 속으로 들어가면 그 물체의 앞쪽에 가해지는 유체에 의한 램 압력(Ram pressure)을 받게 된다. 뜨거운 가스 물질인 은하단 내 ICM을 파고 들어가 은하단 중심으로 더 깊이 빠져 들어가면서 은하는 서서히 강한 램 압력을 받는다. 흐르는 강물에 손을 넣기만 해도 손에 묻은 흙먼지가 흐르는 물의 압력으로 씻겨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손에 묻은 흙먼지가 씻겨 나가듯 은하들도 서서히 은하단 내 ICM에 의해 씻겨 나가는 램 압력 스트리핑(Ram pressure stripping)을 겪게 된다.
이런 램 압력 스트리핑을 겪는 은하들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다. 헤엄치는 방향 뒤로 씻겨 나간 물질을 길게 늘어뜨리는데, 마치 동화 속 헨젤과 그레텔이 남긴 빵가루 흔적 같다. 천문학자들은 이 모습이 길게 늘어진 해파리의 촉수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은하들은 ‘해파리 은하(Jellyfish galaxy)’라는 독특한 별명으로 불린다.
빠른 속도로 은하단 안을 헤엄치면서 자신이 품고 있던 신선한 가스를 빼앗겨 모양과 상태가 변화하는 해파리 은하들은 지금도 우주 곳곳을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램 압력 스트리핑을 당하는 은하들의 별과 가스의 분포를 비교해보면 가스 물질의 분포가 꽤 크게 벗어나 어긋나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은하가 뒤로 흘려보내는 씻겨 나간 가스 물질의 방향을 보면 현재 이 은하가 어떤 방향으로 헤엄치며 은하단의 램 압력을 받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민들레 씨앗이 날아가는 방향만 봐도 현재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있는 것과 같다.[1][2]
결국 램 압력을 오래 받은 은하는 자신이 품고 있던 신선한 가스 물질을 대부분 잃어버린다. 씨앗이 바람에 다 날아가 앙상하게 꽃 기둥만 남은 민들레와 비슷한 모습이다. 은하들은 새로운 별을 만들 재료가 다 밀려 날아간 탓에 더 이상 효율적으로 별을 만들지 못하고 생명력을 잃어간다.
상대적으로 은하단에 갓 끌려 들어온 신입들은 아직 램 압력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은 원래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며 활발하게 어린 별을 만들어낸다. 반면 오래전에 유입되어 긴 시간 ICM의 램 압력을 받은 은하들은 이미 모양도 많이 흐트러졌고 더 이상 활발하게 어린 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처럼 은하들이 함께 모여 복잡하게 어우러져 살고 있는 은하단의 환경은 은하의 모양뿐 아니라 은하의 삶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언제부터 은하단에 끌려들어왔는지 그 시점에 따라서 현재 관측되는 은하들의 외모와 생태가 크게 달라진다.[3]
램 압력을 받으면서 은하가 품고 있던 가스가 씻겨 나가는 과정을 구현한 시뮬레이션.
따라서 은하단에 모여 살고 있는 은하들의 운명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은하가 정확히 언제쯤 은하단의 멤버로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그 시점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은하단에 들어오기 전부터 은하를 쭉 추적해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 모습만 보고는 그 시점을 파악하기가 꽤 어렵다.
이때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각 은하가 은하단 속에서 어디에 있고, 현재 어떤 속도로 헤엄치고 있는지, 공간적 위치와 속도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것이다.
은하단을 이루는 은하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헤엄치고 있는지는 태양계 외곽에서 시작해 태양계 안쪽으로 끌려들어오는 혜성들의 움직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대부분의 혜성들은 태양계 가장 바깥을 떠다니는 얼음 부스러기로 추정된다. 이들은 원래 태양계 외곽을 떠돌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원래 살던 고향을 벗어나 태양계 안쪽으로 끌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태양에서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고 속도도 빠르지 않다.
하지만 태양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속도도 아주 빨라진다. 또 태양에 다가갈수록 태양의 뜨거운 열과 태양이 내보내는 강한 태양풍을 맞게 되면서 얼음 부스러기는 승화하며 기체로 날아간다. 승화한 얼음 부스러기의 잔해는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경로 뒤쪽으로 길게 꼬리를 그리며 남게 된다.
이후 태양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얼음 부스러기는 너무 속도가 빨라진 나머지 한 번에 태양의 중력에 붙잡혀 안정적으로 태양계 안쪽에 머무르지는 못한다. 너무 빨라진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크게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그리며 다시 태양에게서 서서히 멀어지며 태양계 외곽으로 도망쳐 나온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태양의 중력에 붙잡힌 이상 태양에게서 영원히 도망쳐 나오는 것은 아주 힘들다.
한 번 탈출을 시도하며 태양계 바깥으로 도망쳐 나오는 듯하다가 다시 태양계 안쪽으로 끌려오면서 크게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돈다. 이런 여정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결국 혜성은 에너지를 서서히 잃게 된다. 매번 궤도를 돌 때마다 혜성은 태양의 중력을 벗어나 도망이라도 쳐보겠다는 듯 계속 크게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그리지만, 그 타원 궤도도 서서히 작아질 뿐이다.
따라서 그 얼음 부스러기가 현재 태양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현재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비교하면 이 얼음 부스러기가 언제쯤 여정을 시작한 것인지 꽤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은하단 속 은하들도 마찬가지다. 각 은하가 은하단의 중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그 거리와 은하들의 헤엄치는 속도를 함께 비교하는 그림을 ‘페이스-스페이스 다이어그램(Phase-space diagram)’이라고 한다. 천문학자들은 이 다이어그램 위에 은하들의 위치와 속도를 비교하면서 각 은하가 이제 갓 은하단으로 끌려오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오래전에 끌려와 은하단 한가운데로 완전히 가라앉은 은하인지를 비교한다.[5][6]
어떤 은하가 은하단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서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면 이는 이제 갓 은하단에 끌려가기 시작한 신입이다. 어떤 은하가 은하단 중심 가까이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면 이는 이제 처음으로 은하단 중심을 스쳐 지나고 있는 녀석이다. 어떤 은하가 은하단 중심에 가까이 붙어서 느린 속도로 헤엄치고 있다면 이는 오랜 시간 여러 번에 걸쳐 은하단 외곽과 중심부를 왕복하며 서서히 에너지를 잃고 은하단의 중력에 완전히 포획된 나이 많은 은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다.
실제 우주에 있는 은하단은 입체적인 공간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 입체적인 형체가 평면에 투영된 모습으로 관측한다. 실제 달은 둥근 공 모양이지만 하늘에서는 동그란 원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실제로는 은하단 외곽에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더라도 우연히 은하단의 중심부와 비슷한 방향에 걸쳐 자리하고 있으면 지구에서 봤을 때는 은하단 중심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7]
우리가 직접 우주선을 타고 먼 은하단까지 날아가서 직접 보지 않는 한 이 문제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 그래서 최근 천문학자들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관측의 한계를 극복해나가고 있다. 시뮬레이션 결과를 실제 관측되는 은하단의 데이터와 비교해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 은하들이 대략 언제쯤 은하단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는지를 파악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최근 천문학자들은 해파리 은하들에 대한 새로운 결과를 확인했다. 흥미롭게도 해파리 은하들은 대부분 은하단 중심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서 잠시 은하단 외곽으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은하들에서 많이 발견된다. 빠른 속도로 은하단 중심부를 스쳐 지나간 후 잠깐 바깥으로 벗어나 있는 이런 은하들을 백-스플래시 은하(Back-splash galaxy)라고 부른다.[8]
낯선 집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더 힘들고 고생하는 것처럼 은하들도 처음 은하단 중심으로 끌려들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은하들 대부분은 처음 은하단 중심을 맛보고 다시 잠깐 은하단 외곽으로 도망쳐 나오는 이 백-스플래시 과정에서 가장 혹독한 램 압력 스트리핑을 겪는다. 이때 은하들은 뚜렷한 해파리 은하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그나마 좀 더 듬직한 사람이 낯선 환경에서의 스트레스를 더 잘 견디듯이 은하들도 더 무거울수록 램 압력 스트리핑을 더 잘 견디는 것으로 나타났다.[9]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은하들은 은하단 환경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이전부터 서서히 신선한 가스 물질들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생각된다. 은하단의 ICM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준비 운동이라도 하는 것일까. 본격적으로 은하단 환경에 진입하기 전부터 서서히 은하가 가스 물질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 이런 프리-프로세싱(Pre-processing)은 지금보다는 주로 우주의 초기 시절에 더 왕성하게 벌어지면서 오늘날 우주 수족관을 살아가는 은하들의 형태를 다잡아온 것으로 생각된다.[10][11]
우주 공간을 채우는 가스 물질 같은 유체의 역할은 최근까지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다. 유체역학은 수학적으로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고, 우주 공간 속 가스 물질을 직접 관측하게 된 것도 꽤 최근의 일이다. 그래서 과거 천문학자들은 우주를 표현할 때 단순히 질량을 갖고 있는 은하들이 주고받는 중력에 의한 효과만 고려했을 뿐이다.
하지만 진짜 우주는 그렇게 밋밋하지 않다. 이 넓은 우주는 다양한 가스 물질, 유체로 채워져 있다. 우주를 부유하는 은하들은 가스 물질의 물결에 따라 하염없이 떴다 잠겼다 할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은하들의 겉모습, 은하가 얼마나 별을 만들어내는지 등 은하의 운명이 달라진다.
최근에서야 유체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닫고 다루게 된 천문학은 우주의 진리라는 거대한 은하단을 향해 이제 막 진입(Infall)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은하가 서서히 은하단 속으로 들어가면서 더 강한 유체들의 램 압력을 마주하는 것처럼, 천문학 역시 우주의 유체가 선사하는 강한 램 압력을 마주하며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조금씩 변형되고 완성될 것이다.
천문학은 더 깊고 안정된 진리를 향해 지금도 헤엄치고 있다.
[1] https://iopscience.iop.org/article/10.1088/0004-637X/783/2/109/meta
[2] https://academic.oup.com/mnras/article-abstract/461/2/1202/2608612?redirectedFrom=fulltext
[3] https://iopscience.iop.org/article/10.3847/1538-4357/aa6579/meta
[4] https://www.aanda.org/articles/aa/abs/2012/08/aa18311-11/aa18311-11.html
[5] https://www.aanda.org/articles/aa/abs/2012/09/aa19957-12/aa19957-12.html
[6] https://academic.oup.com/mnras/article/448/2/1715/1061483
[7] https://iopscience.iop.org/article/10.3847/1538-4357/aa6d6c/meta
[8] https://academic.oup.com/mnras/article-abstract/484/3/3968/5298499?redirectedFrom=fulltext
[9] https://academic.oup.com/mnras/article-abstract/483/1/1042/5203633?redirectedFrom=fulltext
[10] https://academic.oup.com/pasj/article/56/1/29/1418842
[11] https://iopscience.iop.org/article/10.3847/1538-4357/aadda2/meta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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