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내 돈 주고 산 제품에 감동을 받는 순간이 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내 욕구와 불편함까지 캐치해 구석구석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제품을 만났을 때다. ‘아니, 누가 내 마음을 읽고 이런 기능을 만든 거지?’ ‘이것은 진정 나를 위한 제품이야!’ 그러한 제품 개발의 배경에는 보통 세그멘테이션(Segmentation) 연구가 있다.
세그멘테이션은 ‘평균적인 소비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분절하다’라는 의미의 ‘세그먼트(segment)’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연구는 수많은 소비자들을 의미 있는 집단으로 나누는 작업이다.
# 평균적인 소비자는 없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라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면 쉽다. 한 반 45명의 아이들이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지만, 이 중에는 모범생이 있고, ‘노는 애’가 있고,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각종 행사 때마다 앞장서서 분위기를 띄우는 애,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싫어하는 애, 국영수보다는 예술 수업에 더 재능을 보이는 애 등등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다양한 아이들에게 획일화된 교육방법을 적용하면 비용은 적게 들겠지만 개개인의 가능성을 발굴하는 데에는 효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자, 이제 이 45명을 45만 명의 소비자로 확장해보자. 45만 명의 소비자를 상대로 제품 개발이나 마케팅을 할 때, 한 가지 전략으로 공략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평균’적인 서비스나 제품 개발은 가능할지 몰라도 예리한 타기팅(Targeting)이나 섬세한 제품 개발은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본격적으로 세그멘테이션이 이용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나이, 성별, 지역, 경제 능력 등 기본적인 요소만 활용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세그멘테이션은 기본적인 통계자료를 넘어 소비자 그룹을 작지만 분명한 색깔이 있는 그룹으로 세분화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인터넷의 진화, 스마트폰의 일상화가 틈새시장을 공략한 일대일 마케팅의 가능성을 드라마틱하게 확장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롱테일(Long tail)’ 패러다임이다.
#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자에게 인생철학을 묻는다?
몇 년 전, 미국에서 손꼽히는 음악 스트리밍 앱 브랜드가 세그멘테이션 연구를 의뢰했다. ‘뻔한’ 요소들로 소비자를 구분하는 세그멘테이션이 아니라(Beyond the obvious),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을 ‘사람’으로서 깊이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세그멘테이션을 해달라고 주문했다.
기존의 음악 관련 세그멘테이션이 음악과 관련된 소비자 성향, 즉 음악을 듣는 방법, 음악을 듣는 시간, 좋아하는 음악 장르, 유료 서비스 이용 등에만 한정되어 데이터를 분석했다면, 우리는 음악 관련 행동과 성향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성격, 인생철학, 꿈, 라이프 스타일 등을 아울렀다. 당시 설문지 내용을 살짝 공개하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사실을 근거로 하는지 아니면 직관을 근거로 하는지, 내성적인지 외향적인지, 미래가 중요한지 현재가 중요한지 등 두 가지 상반되는 보기가 있을 때 어떻게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지를 묻고, 이를 토대로 추론·분석했다.
우리는 미국 내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자 5000명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해 6개의 의미 있는 세그먼트를 발굴했다. 그중 3개의 세그먼트가 집중 공략 대상으로 떠올랐고, 그들의 니즈와 성향은 향후 제품 개발(Feature development)의 초석이 되었다. 특히 이 연구에 반영된 음악 성향 외의 사람을 이해하는 여러 가지 맥락은 제품을 개발하고 광고를 만드는 작업 시 최종소비자를 쉽게 상상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 고객만큼이나 중요한 직원들을 ‘잘 대접하기’ 위해
세그멘테이션은 비단 소비자에 관한 연구로 국한되지 않는다. 재작년에 진행했던 세그멘테이션 연구는 사상 처음으로 소비자가 아닌 계약직 직원들을 상대로 한 대규모 연구였다. 클라이언트는 미국의 주류 승차공유서비스 앱. 한국에서도 요즘 ‘쏘카’나 ‘타다’와 같은 승차공유서비스가 부상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제 우버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우리의 임무는 앱 유저가 아닌 드라이버들을 상대로 한 세그멘테이션 연구였다. 이들의 비즈니스 모델에서는 최종소비자만큼 드라이버들도 중요하다. 드라이버가 없으면 일단 고객의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 안정적이고 기민한 서비스의 제공이야말로 이 비즈니스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회사의 드라이버 5000명을 상대로 온라인 설문 조사를 실시, 4개의 세그먼트를 발견했다. 브랜드 관점에서 유치하고픈 드라이버들이란 이 일 자체를 즐기고, 오랜 시간 운행할 수 있으며, 수익도 높은 사람들이다. 이런 부분을 고려해 우리는 필수 공략 대상 세그먼트 2개를 발견했고, 이들을 어떻게 ‘잘 대접해야’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지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향후 드라이버 유치, 유지 전략을 세우는 데 장기적으로 요긴하게 활용됐다.
세그멘테이션은 회사의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면 대대적으로 진행한다. 이때는 사내 소비자 연구 부서뿐만 아니라 제품, 마케팅, PR, 오퍼레이션 등 다양한 부서가 피드백을 주며 관여한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전략을 짜야 하기 때문이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사원들에게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소비자에게 맞는 제품/서비스를 전달한다’라는 일관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세그멘테이션은 한시적이 아닌 장기적으로 바이블과 같은 효용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리서처로서 클라이언트를 위해 수행하는 소비자 연구 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연구이기도 하다.
필자 황지영은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엔터테인먼트 경영 석사를 마치고 Fox Television, Warner Bros. Television 리서치 부서에서 일했다. 글로벌 소비자 마케팅 리서치 회사 Hall & Partners, Kelton Global에서 경력을 쌓고 2015년 소비자 마케팅 연구 회사 마인엠알(MineMR)을 설립, 현재 미국 LA에서 글로벌 기업들을 클라이언트로 소비자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황지영 MineMR 대표·마케팅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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