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폭풍전야다, 폭풍전야. 저쪽이 4000명이라고? 우리가 머릿수 달리는 거 아이가.” 계단에 쪼그려 앉아 ‘컵밥’을 한 숟가락 삼키던 의경이 옆 후임에게 말했다. 식사를 마친 의경은 착용하고 있던 보호구를 다시 고쳐 맸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좀처럼 시위 현장에서 보이지 않던 ‘타격대’였다.
현대중공업 주주총회를 하루 앞둔 30일 울산 동구 한마음회관 주변은 쪼그려 앉아 식사하거나 널브러져 누워 휴식을 취하는 의경과 금속노조 조합원들로 가득했다. 31일 오전에 진행될 현대중공업 주총을 막으려는 노조원들은 텐트와 오토바이, 플래카드와 밧줄로 일종의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한마음회관 안쪽에서, 그 노조원들과 충돌을 걱정하는 의경들은 바리케이드 바깥쪽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30일 현재까지 양측 간 접촉은 없었다.
현대중공업은 한국조선해양의 법인분할과 한국조선해양의 소재지를 서울로 정한다는 두 안건을 주주총회에 상정했다. 법인분할은 대우조선해양 인수·합병을 의미했다. 대우조선 매각에 반대하던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지난 25일부터 주주총회 장소인 한마음회관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점거 농성 6일째인 30일엔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현대자동차지부, 대우조선해양지부 노조원 등 4000명가량이 모여 영남권 노동자대회를 열었다.
노동자대회를 주최한 민주노총은 농성장을 오간 사람까지 합쳐 1만 명이 모였다고 추산했다. 경찰은 이날 노사 충돌 사태에 대비해 기동대 64개 중대 4200명을 배치했다.
농성장 ‘내부’는 ‘외부인’에게 예민했다. ‘박살’이라는 문구가 박힌 노조 조끼를 입지 않거나 ‘법인분할 반대’ 머리띠를 두르지 않은 사람은 ‘외부인’으로 분류되는 듯했다. 노란색 ‘보도’ 완장을 차지 않고선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릴 수도 없었다. 앞쪽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은 발언자는 “한마음회관을 빼앗기는 것을 결사 저지하겠다”며 팔뚝을 힘껏 들었다.
세계 1위와 2위 조선소인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노동조합은 주주총회를 저지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지만 다른 색의 모자를 쓰고 서로를 식별했다. 입장에 차이가 있었다. 대우조선 노조와 거제의 정치인들은 대우조선 매각 자체를 반대했지만, 현대중공업 노조와 울산의 정치인들은 ‘대우조선을 인수·합병한 현대중공업’(한국조선해양)의 소재지가 울산에서 서울로 바뀌는 것을 반대했다.
대우조선 노조는 현대중공업 노조와 비교해 벼랑 끝에 몰린 처지다. 현대중공업에 인수되면 곧바로 구조조정이 뒤따라올 것이라 걱정 때문이다. 거제에서 온 대우조선 노조원은 “우리는 목숨 걸고 온 거다. 현대중공업에 서운하지 않고 오히려 고맙다. 현대중공업은 사실 소재지 변경을 두고 사측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데, 우리와 연대해주고 있는 것”이라며 “아마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내일 주총이 개최되긴 어렵지 싶다”고 기대를 내비쳤다.
업계 전문가들도 한국조선해양의 소재지가 중요하진 않다고 본다.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의 저자 양승훈 경남대 교수는 “한국조선해양의 소재지가 울산이든 서울이든 중요하진 않다. 울산에서 서울로의 인원 이동은 극히 적을 것”이라며 “본사를 울산에 두기도 어렵고, 거제에 두기도 어렵기 때문에 서울로 정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업계 관계자는 “현대중공업이 한국조선해양의 소재지를 서울로 정한 이유는 아마 KDB산업은행이 서울에 있기 때문에, 보고에 유리하기 때문에 그쪽으로 정한 게 아닌가 싶다”고 설명했다.
현대중공업은 31일 주주총회를 예정대로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주주총회는 주주와의 약속이다. 함부로 장소를 바꾸거나 시일을 변경할 수 없다. 강행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사측은 시설물보호와 조합원 퇴거를 경찰에 3차례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지방법원은 이날 집행관들을 현장에 파견해 주주총회를 방해하지 말라는 내용의 재판부 결정을 민주노총에 고지했다. 민주노총은 “생존권 보장을 위해 농성을 풀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저녁 9시 20분을 넘어섰을 무렵, 집회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대열을 빠져나온 노조원들은 자리를 깔고 등을 대고 누웠다. 바리케이트 너머의 의경들도 마찬가지였다. 방패와 보호구를 벗어 두고 앉거나 누워 31일을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이번 농성으로 동네 슈퍼, 카페, 도시락업체 등 주변 상권은 ‘반짝 매출’을 올렸지만 기뻐하는 가게 주인은 없었다. 농성장이자 주주총회 장소인 한마음회관 주변의 카페 주인은 “한마음회관에 저렇게 사람 많이 몰린 건 처음이다. 이런 일로 장사가 잘돼도 좋지 않다. 싸움이 아니라, 조선업 경기가 좋아서 잘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울산=박현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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