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부와 권력이 남성에게 주로 집중되던 과거, 여성이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시대로 눈을 돌려보면 이름이 기억나는 여성이 몇이나 될까? 사극에서 자주 다루는 희빈 장씨 장옥정이나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 희대의 스캔들을 일으켰던 어우동, 권력을 탐한 문정왕후 등이 생각난다.
문사이자 현모양처로 존경받는 신사임당이나 불운한 천재 시인 허난설헌, 훌륭한 장사꾼이었던 김만덕도 거론될 것이다. 그 중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름이 있으니 황진이다. 학창시절 교과서에도 자주 보던 그 이름, 박연폭포와 서경덕과 더불어 송도삼절로 불리는 천하 명기(名妓) 황진이.
기생으로 이름을 날린 이들로는 황진이 외에도 성종 앞에서 문무백관을 쥐락펴락하는 시를 남겼던 소춘풍이 있고, 적장을 끌어안고 투신한 진주 기생 논개가 있고, 황진이 버금가는 실력으로 이름을 날린 매창도 있다. 그렇지만 인지도로 봤을 때 황진이만 한 이를 찾기 힘들다. 역사에 이름을 날린 것은 물론 후대에도 끊임없이 대중문화에서 재해석되고 있으니 말이다.
2006년 방영한 드라마 ‘황진이’ 또한 그 중 하나인데, 이 드라마가 재미난 건 빼어난 시심과 명사와의 교류 등으로 기억되는 황진이를 춤에 정진하는 예인(藝人)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황진이에 대해서는 생몰년도도 미상일 만큼 정확한 사료 외에 야사가 많은 편인데, 드라마 ‘황진이’는 여러 야사 중 사대부 양반과 사랑에 빠졌으나 아이를 갖자 버림받고 눈까지 멀어버린 기생 현금(전미선)이 낳은 딸이 황진이라고 설명한다. 종모법에 따라 어미가 기생이면 딸도 기생으로 살아야 하지만 아이를 기생으로 키우고 싶지 않았던 현금은 어린 진이(심은경)를 절로 빼돌려 키웠다. 그럼에도 황진이 스스로 춤을 배우고 싶어 송도 교방으로 찾아오게 된다.
드라마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황진이와 송도 교방 행수 백무(김영애)의 관계다. 조선 제일 춤꾼으로 인정받은 백무가 어린 황진이의 자질을 알아보고 담금질하듯 춤꾼으로 혹독하게 수련시키는 모습이 이어지는데, 그 관계가 흡사 영화 ‘위플래쉬’의 앤드류와 강압적인 플래처 교수와도 같다. 이미 우리는 2003년 ‘대장금’을 통해 발전적 유대관계를 맺는 여성 캐릭터들을 보긴 했으나 백무와 황진이의 관계는 ‘대장금’의 한상궁과 장금이 같은 온화하고도 따스한 관계와는 그 결이 매우 다르다.
백무는 황진이(하지원)가 예인의 길을 걷게 하고자 첫 정인 은호도령(장근석)과 맺어지지 않도록 끊어내고, 약해지려는 순간마다 모질게 대한다.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황진이는 악에 받쳐 어떻게 하면 백무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 고민한다.
여기에 드라마는 백무-황진이에 대비되는 사제관계로 여악 행수 매향(김보연)과 매향의 제자 부용(왕빛나)을 내세운다. 매향은 평생 백무를 라이벌로 여기며 괴로워했고, 부용 또한 황진이를 넘어서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이니, 백무-매향과 황진이-부용은 전형적인 모차르트-살리에르 관계다. 너무 전형적이어서 좀 빤하지 않나 싶은데, 그 빤함을 교묘히 비껴 나가는 게 ‘황진이’의 재미이기도 하다.
‘천재는 노력하는 준재를 참 슬프게 한다’고 말한 매향이 백무에게 평생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처럼, 부용 역시 황진이에 대해 평생 열패감을 지우지 못한다. 그러나 매향과 부용은 여느 드라마에서 흔히 맡는 악역 포지션과는 다르다.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라는 신조로 상황과 판단에 따라 자칫 비열해 보이는 수를 쓰기도 하지만 분명 자신들이 생각하는 재예(才藝)와 예인(藝人)의 길에 대한 기준이 있어 그것을 넘지 않으려 한다.
또 서로 예인의 길을 걷는 만큼 재능이 있는 이에 대해 그 재능을 인정하는 자세도 눈에 띄는 요소다. 호시탐탐 백무를 무너뜨리고 싶어하지만 순간순간 “저 백무는 말이지~” 하고 그의 재능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이는 매향이다. 백무 또한 매향을 자신보다 낮춰 보는 감은 있지만 매향에게 황진이가 검무를 배우도록 은근히 종용할 만큼 매향을 인정한다.
백무가 죽게 됐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한달음에 달려온 이가 매향이란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여자의 적은 여자’ 따위 말은 이 드라마에 발붙일 수 없다. 백무-매향은 물론 황진이-부용 또한 한 남자를 두고 연적 관계에도 놓이지만 남자 때문에 자신들의 재능을 망치는 일은 없거든.
예인의 길에 무섭도록 매진하는 여성들이 줄지어 나오기에, ‘황진이’에서 가장 매력이 덜한 부분은 황진이를 둘러싼 남녀관계다. 실제 우리는 상사병으로 죽은 이름 모를 이웃집 총각이며, 콧대 높은 왕실 종친 벽계수, 짧고도 애틋한 사랑을 나눈 문신 소세양, 파격적인 6년간의 동거생활을 한 명창 이사종, 이름이 높았으나 황진이의 유혹에 파계하고 만 지족선사, 황진이가 꺾지 못하고 스승으로 모셨다는 화담 서경덕 같은 인물과의 일화로 황진이를 기억한다.
그러나 드라마에선 첫사랑 은호도령(아마도 상사병으로 죽은 이웃집 총각이 모델인 듯)과 왕실 종친 벽계수, 그리고 가상인물로 예조판서 김정한으로 황진이의 남자를 압축한다(드라마 말미 서경덕이 나오지만 미미한 분량). 특히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로 망신당한 정도로 기록되는 벽계수는 이 드라마에서 황진이에게 처절할 정도로 집착하는 비루한 사내로 전락하여 연민이 갈 정도.
‘황진이’는 여악 행수 자리를 두고, 최고의 춤꾼이라는 명예를 두고 황진이와 부용의 대결을 마지막 화에 배치하는 등 여러 모로 긴장을 늦추지 않는데, 드라마 내내 고수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재예를 갈고닦는 예인의 삶과 철학을 견지하는 데 있다. “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학춤을 추며 세상을 뜬 백무의 비장한 선언은 왕실과 사대부만이 아닌 모두가 함께 춤추고 즐기는 신명 나는 세상을 꿈꾸며 “춤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읊은 황진이의 마지막 내레이션으로 이어진다.
황진이를 노류장화(路柳牆花) 기생의 삶이 아닌 한 가지 길에 몰두하는 예인이자 장인으로 묘사했기에 ‘황진이’가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는 게 아닐까.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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