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이번 주 한국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바이오헬스 국가 비전 선포식에 참석하여 이 분야를 시스템 반도체, 미래형 자동차와 함께 3대 신산업으로 선정, 차세대 주력산업으로 중점 육성할 계획을 발표했다고 들었다. 특히 의료 관련 빅데이터 구축 계획을 언급해, 그동안 개인정보 보호 문제 등으로 인해 제약이 많았던 유전체 연구나 의료 데이터 활용 등이 활기를 띠게 될 전망이다. 바이오헬스가 한국 경제를 다음 단계로 끌어 올릴 ‘제2의 반도체’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큰 모양이다.
우연찮게도 이번 주 프랑스에서는 DNA가 ‘제2의 반도체’라며 기염을 토하는 바이오헬스 스타트업이 3850만 달러(460억 원)의 시리즈 B 투자 유치에 성공해 주목 받고 있다. 2014년에 창업한 ‘DNA스크립트(Script)’가 그 주인공이다.
바이오헬스 분야는 오랜 연구 개발 기간이 필요하며 짧은 시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다. 실패 가능성도 높아, 투자 자금 회수 압박에 놓인 스타트업보다는 여러 연구 포트폴리오를 장기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대기업에 더 유리한 면이 있다. 창업한 지 5년밖에 안 되었음에도 혁신적인 DNA 합성 기술을 개발해 상용화 문턱에 다다른 DNA스크립트가 주목받는 이유다.
합성 생물학(Synthetic Biology)은 3개의 핵심 기술로 구성된다. 첫째 분석(Analytics), 즉 유전자 지도(Genome)를 그리고 이에 포함된 각각의 유전자 역할을 규명하는 것, 둘째 이를 기반으로 특정 역할을 하는 DNA를 합성(Synthesis)하는 것, 셋째 편집(Editing), 즉 유전자 가위(크리스퍼: CRISPR)라고 불리는 기술을 활용하여 DNA에 유전자 코드를 넣거나 빼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 중 분석과 편집은 최근 몇 년 사이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합성 기술은 50여 년 전 처음 시도된 이후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뎠다. 화학 물질을 사용해 DNA 체인을 구성하는데, 한 번에 200여 개의 핵산을 연결하는 것이 한계였기 때문에 이것들을 다시 결합해야 하나의 완성된 유전자를 합성해낼 수 있다. DNA스크립트는 효소 기술을 사용해 이 체인을 더 길게 만들어 DNA 합성 과정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오류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효소를 이용한 DNA 합성 기술을 혁신하는 스타트업은 또 있다. 하버드대 조지 처치(George Church) 교수의 뉴클리어(Nuclear), UC버클리대 제이 키슬링(Jay Keasling) 교수의 안사 바이오(Ansa Bio) 등이다.
경쟁자들이 유전자와 분자 생물학계의 거두인 데 비하면, 아직 30대 초반의 CEO 토마 이베르(Thomas Ybert)가 이끄는 DNA스크립트는 ‘꼬꼬마’로 보인다. 하지만 올해 초 AGBT(Advances in Genome Biology and Technology)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DNA스크립트의 효소 합성 기술은 상업적 활용 단계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기 위해 이번 투자를 유치한 것이다.
이베르가 DNA 합성 기술을 반도체에 비유한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반도체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산업 전반에 활용되는 기반 기술이듯, 합성 DNA도 신약 개발 같은 바이오헬스뿐 아니라 바이오연료 등 지속 가능한 생화학 제품의 생산, 농업 생산성 향상 등 다양한 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기반 기술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둘째, 말 그대로 반도체를 대신하는 DNA 역할이다. 데이터를 DNA에 저장하고 연산을 수행하게 하는 ‘DNA 컴퓨팅’은 수억 개 분자들의 상호 작용을 통해 특히 병렬 처리에 뛰어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DNA 합성의 어려움 때문에 이론적으로만 가능했다. 만약 원하는 형질의 고품질 DNA를 빠르게 합성해내는 기술이 상용화된다면 그 활용 범위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번 투자 유치가 목표액을 초과 달성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DNA스크립트의 창업자이자 CEO인 토마 이베르는 프랑스의 독보적인 이공계 엘리트 양성 기관 에콜 폴리테크닉 출신이다. 박사학위 과정 중 제약회사 사노피(Sanofi)의 산학협동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효소 기술을 활용한 바이오 신약 생산 플랫폼을 개발했다. 학위 취득 후에는 세계 7대 슈퍼메이저 석유회사로 매출이 250조 원에 달하는 토탈(Total)의 신에너지 개발부에서 4년간 일하면서 바이오연료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경험을 통해 DNA 합성 기술이 다양한 분야에 핵심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는 시장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명문공대 졸업생이 대기업의 연구 개발 분야에서 일하면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창업에 나서는 경우는 한국에서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이베르의 경우에는 서로 분야가 다른 대기업의 핵심 연구 개발 부서에서 일한 경험이 도움이 되었을 듯하다. 비유하자면 카이스트(KAIST) 전자과 박사 과정 학생이 삼성전자에서 산학 연구를 하다가 학위 취득 후 현대자동차 전장(電裝) 사업 부문에서 일한 뒤 창업한 격이다. 한국에서도 점점 많은 젊은 인재들이 이와 같은 융합형 연구 경험을 통해 기술 기반의 창업 기회를 잡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번 시리즈 B 투자는 유럽의 바이오헬스 전문 벤처캐피털리스트(VC)인 LSP(Life Sciences Partners)가 주도했다. LSP는 1988년 네덜란드에서 설립되어 그동안 120개 이상의 바이오헬스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GSK, 파이저 등 글로벌 제약회사들을 전략투자자로 두고 20억 유로(2조 3000억 원)가 넘는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에서 그 분야를 잘 이해하고 지원하는 전문 VC들의 전략적 투자가 필수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 우리나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국내 바이오헬스와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는 온갖 규제로 손발이 묶여 있는 현실이다. 특히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대기업이 간과하기 쉬운 영역에서 발빠르게 혁신을 창출해야 할 스타트업들이 높은 진입장벽에 막혀 번번히 좌절하고 있다.
작년에 아산나눔재단이 발간한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이 분야에서 활약하는 글로벌 상위 100개 스타트업 중 한국에 진출한다고 가정할 경우, 각종 규제로 인해 사업이 제한될 기업이 3분의 2가 넘는다고 한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도 이런 문제를 인식해 규제를 국제 기준에 맞게 완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 건강과 생명 윤리 또한 지켜야 하는 만큼 그 균형을 맞추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지난주 파리에서 열린 스타트업 행사인 ‘비바테크(VivaTech)’에도 한국의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이 많이 참여했다. 그 중 상당수가 국내에서는 규제에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해외 진출에 성공한 뒤 역으로 국내로 사업을 확장하는 방법을 고려한다고 말한다. 일단 해외에서 성공하면 공무원과 정치권도 시각을 좀 바꾸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스타트업들에게 가급적이면 좁은 국내에 갇혀 있지 말고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하라고 조언하는 나로서는 반가운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창업가들이 자국 시장이 너무 좁아 어쩔 수 없이 글로벌 시장을 지향한 것이 결국 창업국가로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우리나라는 뛰어난 의료기술력과 90%를 넘는 의료기관 전자의무기록(EMR) 보급률, 압도적인 스마트폰 보급 등으로 바이오헬스와 디지털 헬스케어가 성공할 좋은 토양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게다가 지난 십수 년 동안 전국 의대들이 상위권 학생들을 싹쓸이했다. 서울대 공대나 KAIST의 최상위권 학생들이 지방대 의대 진학을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재수하는 사례를 들며 이공계 위기를 걱정하는 소리는 이제 식상할 지경이다.
젊은 두뇌들을 빨아들여온 의료 산업이 이제는 국부(國富) 창출에 기여해 대한민국 경제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 기회가 온 게 아닐까.
필자 곽원철은 한국의 ICT 업계에서 12년간 일한 뒤 2009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현재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 담당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8년 한-프랑스 스타트업 서밋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기재부 주최로 열린 디지털이코노미포럼에서 유럽의 모빌리티 시장을 소개하는 등 한국-프랑스 스타트업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곽원철 슈나이더일렉트릭 글로벌전략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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