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무아, 잘 지내? 나 드디어 순례길이야!” 얼마 전 페이스북을 통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함께 걷자며 매일 저녁 러닝을 함께하던 중국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눈 비비고 보니 벌써 5월이다. 슬슬 순례길을 향한 발걸음이 분주해질 시기가 다가왔다.
순례길을 배경으로 한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하숙’ 때문인지 실제로 주변의 여럿이 순례길을 준비하며 이것저것 물어온다. 문의를 받을 때면 한편으론 부러움이 몰려온다. 일렁이는 마음을 부여잡고 오늘은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순례 중에 들르면 좋을 ‘깨알 마을’을 소개하려고 한다. 참고로 나는 가장 많은 순례자가 찾는 ‘프랑스길’을 걸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성인 산티아고(야곱)의 축일은 7월 25일이다. 5월 말과 6월 중순 사이, 여름에 온전히 진입해 스페인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데도 불구하고 스페인 순례길을 찾는 순례자가 많아지는 이유다. 다들 산티아고의 축일에 맞춰 순례길의 끝, 그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고 싶어한다.
순례길의 각 도시나 마을에선 이 시기에 맞춰 많은 축제를 연다. 순례자 입장에선 더욱 풍성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이 몰리기 때문에 순례길 번잡할 우려도 있고, 숙소인 알베르게 쟁탈전이 치열해질 수도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 ‘과거와 현재의 도시’ 팜플로나
먼저 팜플로나다. ‘생장 피에드포르’에서 시작했다면 3일이면 당도하는 도시다. 묵고 싶지 않아서 그냥 지나쳐 가는 순례자를 보진 못했지만, 빈 알베르게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다음 도시로 넘어가는 순례자는 봤다. 지금 시기에 순례길을 찾는 이들은 미리 예약을 하거나, 정 자리가 없다면 공립 알베르게를 찾으면 도움이 된다. 공립 알베르게는 비교적 늦게 자리가 찬다.
팜플로나는 아주 매력적인 도시다. 아무것도 모르고 가도 웅장한 성벽을 마주하는 순간 꼭 한 번 묵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된다. 성안엔 2000년 역사를 지닌 궁전과 성당이 기다리고 있다. 오래된 건축물이 전통적인 느낌을 주는 한편, 인구 25만의 대도시인 팜플로나엔 현대식 건물과 음식점일 즐비하다. 시공간을 초월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우리에겐 산 페르민 축제, 일명 소몰이 축제로 잘 알려진 도시다. 7월 6일부터 7월 14일까지 열리는데, 소몰이 행사인 ‘엔시에로’는 7월 7일에 진행된다. 산티아고 축일을 노리는 순례자가 즐기기엔 시기상 어렵다. 하지만 팜플로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흥이 많기로 유명하며, 크고 작은 축제가 끊이지 않기에 운이 좋으면 뜻밖의 축제를 만날 수 있다. 내가 도착한 5월 27일에도 축제가 열렸는데, 이름과 의미는 잘 알 순 없었지만 마을 사람 전체가 거리에 나와 춤추는 광경에 흥겨웠던 기억이 또렷하다.
팜플로나는 ‘부르고스’ ‘레온’과 더불어 순례길의 3대 대도시다. 축제가 아니더라도 산책만으로도 고즈넉한 기분을 한껏 느낄 수 있다. 묵고 가는 걸 추천한다.
# 시원한 물놀이가 필요하다면 ‘몰리나세카’
마을 입구에 들어섰을 때 ‘여기는 천국인가’라는 생각을 했던 마을이다. 순례 24일째 도착했다. 비교적 마지막 코스에 있다. 14세기에 지어진 산 니콜라스 데 바리 교구 성당과 함께 중세풍의 외관에 더불어 마을 입구의 다리 아래로 시냇물이 흐르는 마을이다. 6월 17일 찾았을 때 마을 사람들이 물가에 나와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한 할머니가 “우리는 매일 이러고 삶을 즐긴다우”라고 했는데, 그 말은 좀 과장인 듯했지만 그 풍경만큼은 부러울 정도로 평화롭다.
지금 시기에 순례를 하는 독자라면 꼭 수영복을 챙겨가길 바란다. 물놀이와 일광욕이 그동안 쌓인 피로를 한 방에 풀어줄지도 모른다. 몰리나세카는 음식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소시지, 육포, 돼지족, 양과 염소 고기, 송어, 비에르소식 수프 등 다양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나는 ‘족발’과 흡사한 요리를 먹었는데, 사실 그것보단 풍경이 더 매력적인 곳이다.
# 일몰을 좋아한다면 ‘오 세브레이로’
갈리시아 지방에서 만나는 첫 마을이다. 산간 마을인데, 일몰이 장관이다. 일몰 시간이 되면 대부분 순례자가 돌담에 걸터앉아 해가 산 능선 아래로 떨어지는 걸 바라본다. 식료품을 살 곳이라곤 작은 구멍가게 하나가 전부고, 묵을 곳은 공립 알베르게 하나밖에 없을 만큼 작은 마을이지만, 이곳에서의 휴식은 고된 산길을 오른 뒤라 더욱 꿀맛이다. 참고로 이곳 알베르게는 예약을 받아주지 않는다.
참고로 오 세브레이로에서 30km 전 마을이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다. ‘스페인하숙’ 촬영지. 사실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는 많은 순례자가 묵지는 않지만 나는 이 마을에 묵었는데, 알베르게가 마을 입구에 몰려 있어 ‘스페인하숙’이 있던 마을 출구 쪽엔 순례자가 많이 가진 않는다.
# 순례의 끝이 아쉽다면 ‘몬테 도 고소’
‘즐거움과 환희의 산’이라는 뜻을 가진 언덕 마을인 몬테 도 고소는 순례길의 도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전 마지막 마을이다. 단 5km 떨어져 있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말이 5km이지만 체감했을 땐 그보다 훨씬 적게 느껴진다. 한 시간 내로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했던 것 같은데, 걷다 보면 빨리 끝내고 싶지 않아 발걸음을 절로 늦추게 된다.
대부분의 순례자는 이 마을에서도 묵지 않는다. 목적지 5km 전 마을에 묵기엔 일정상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5km라면 적어도 한 시간 내로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몬테 도 고소에 묵기로 마음먹고 온 순례자도 ‘에잇’ 하며 좀 더 걸어 순례를 마친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 마을에 묵기를 추천한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바라보면서 순례의 마지막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면 산티아고 대성당 광장에 도착했을 때 느낄 헛헛한 마음을 조금은 달랠 수 있다.
# 800km 대장정의 마지막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마지막으로 추천할 장소는 800km의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의외로 이곳에서 하루 이상 묵는 순례자가 드물다. 이곳에 도착해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증명서를 발급받고 미사에 참석하면 시간을 훅하고 지나간다. 다음날 ‘피니스테라’나 ‘묵시아’로 추가 여정을 떠나기 일쑤다. 그러다 보면 막상 800km 걷는 내내 머릿속으로 그렸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대한 기억은 없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만 일주일을 머물렀는데, 매일 광장에 나가서 순례를 마치는 이들을 지켜봤다. 고된 순례를 마쳤지만 아무도 박수를 쳐주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는 순례자도 있고, 허탈함에 표정을 잃는 순례자도 있다. ‘뭘 위해서 이 길을 걸었지?’라는 물음에 답할 깜냥은 여전히 안 되지만, 그동안의 방향키였던 노란 화살표가 없더라도 앞을 나아갈 힘을 얻었다는 걸 느낀다.
대성당에서 진행하는 미사에 꼭 참석하길 추천한다. 매일 정오에 시작한다. 미사라는 ‘세리머니’는 끝난 순례길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못하는 마음에 다음으로 나아갈 용기를 준다. 때때로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 강복 의식이 진행된다. 이땐 8명의 수사가 온 힘을 다해 황금빛 향로를 흔드는데, 연기를 내뿜는 향로가 대성당 천장을 가로지르는 장면은 생경하다.
박현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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