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오랫동안 인생드라마를 꼽으라고 하면 ‘모래시계’를 꼽아왔다. 방영한 지 25년 가까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세 손가락 안에는 꼽히는 작품이다. ‘모래시계’가 왜 명작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에너지 낭비요, 지면 낭비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가장 큰 장점을 들자면 역시 5.18 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다뤘다는 점이다. 1995년 초, 문민정부 시대지만 그래도 5.18이 일어난 지 고작 15년에 불과할 때다. 지금도 걸핏하면 5.18과 관련해 각종 망언이 터져 나오는데 당시는 오죽했을까.
그때 중학생이었던 나는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운명과 비장한 분위기에 취해 ‘모래시계’가 다뤘던 시대상을 감상적으로만 바라봤던 것 같다. 드라마의 배경은 굉장히 오래전 과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머리가 점점 더 굵어지고, 아버지가 사온 ‘모래시계’ 비디오테이프를 반복해 보며 대사를 외울 지경이 되면서 이 드라마가 얼마나 무거운 이야기를 다뤘었는지 새삼 놀랐다.
‘모래시계’는 조직폭력배 행동대장 박태수(최민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법대생 강우석(박상원), 그리고 카지노 대부의 딸인 윤혜린(고현정)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주먹질 잘하지만 의리가 남다른 태수는 육사를 지망하지만 어릴 적 세상을 뜬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이유로 육사행이 좌절되고 주먹세계로 빠진다. 공부를 잘했던 가난한 집 장남 우석은 아버지가 비료 도둑의 누명을 쓰고 땅을 빼앗기는 일을 보면서 판검사가 되어 정의를 구현하고자 마음먹는다. 절친한 친구 사이던 태수와 우석은 그렇게 시작부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카지노 대부 윤재용 회장(박근형)의 딸 혜린은 대학에 들어와 운동권에서 활동하며 아버지를 부정한다. 유신철폐를 주장하며 중간고사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왜 시험을 안 치르는 것에 반대하면 안 되냐고 묻는 우석이 데모하는 혜린과 가까워진 건 그들이 푸르르게 젊었고, 또 가치와 성향이 어찌 되었든 서로 괜찮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석의 친구인 태수가 그들의 하숙집에 들르면서 자연 세 사람은 친해진다.
그러나 시대는 암울했고, 정치권의 사주를 받기 쉬운 조직폭력배와 법관을 지향하는 법대생, 데모하는 부잣집 딸이 함께 순수하게 어울릴 수 있었던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태수의 조직이 야당 당사에서 단식 농성을 하던 여공들을 습격한 일(YH 사건을 기본으로 했다)을 시작으로, 부마항쟁과 10.26 사건을 지나 1980년 5월 18일을 맞게 되는 것.
고향으로 내려간 후배를 만나고자 광주로 내려간 태수가 무차별적으로 시민들을 폭압하는 계엄군에 맞서 시민군에 합류하고, 군대에서 계엄군으로 차출된 우석은 자신들과 대치하는 시민군 사이에서 태수를 발견한다. 상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1980년 5월의 광주를, ‘모래시계’는 자료화면을 적절히 섞어가며 약 2화에 걸쳐 상세하게 묘사한다. ‘모래시계’는 5.18과 YH 사건, 삼청교육대 등 굵직한 실제 사건들을 다루는데, 그중 5.18은 세 주인공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우석은 계엄군이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한때 사법고시를 포기할 뻔하고, 검사가 된 이후에도 항상 광주에 있었던 자신을 잊지 않으려 한다. 태수는 살아남아 다른 사람들에게 광주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던 후배 어머니의 말을 지키지 못함을 자책한다. 대신 그는 그 일을 기점으로, 그리고 혜린과의 사이를 끝내려는 윤 회장의 사주로 삼청교육대에서 처절한 시간을 보낸 이후로 ‘힘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풋풋한 스무 살 시절 정치깡패의 말로는 결국 사형이지 않냐고 되묻던 그가 정치깡패가 되어서라도 힘을 가지고자 하는 데에는 광주의 기억이 도사리고 있었다.
혜린은 셋 중 유일하게 광주를 경험하지 않았지만 운동권 활동과 그 직전 있었던 5.15 서울역 집회(요즘 한창 회자되고 있는 일명 ‘서울역 회군’)의 여파로 잡혀 들어간다. 심한 취조와 고문으로 결국 경찰이 원하는 대로 자백하고 아버지의 빽으로 풀려난 혜린은 변절자가 되어 동지들과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절망적이던 혜린이 태수와 사귀게 되는 것도 이때의 쓰라린 기억 때문이리라.
다시는 힘이 없어 내 여자를 빼앗기고 짓밟히지 않으리란 다짐으로 정치권의 줄을 잡고 카지노 거물이 된 태수는 결국 친구 우석에게 사형 구형을 받고 “나, 떨고 있냐”는 말을 남기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상식대로 사는 사회를 꿈꾸었던 검사 우석은 정치권의 줄을 잡은 조직폭력배 출신 친구를 잡아넣긴 했지만 그를 조종하고 좌지우지했던 세력에게 정당한 치죄를 하지 못한다.
동일방직 여공들이 단식 농성하는 걸 보고 돌아오는 길에 쌀을 샀다며 창피해하며 울던 혜린은 아버지의 카지노 사업을 물려받지만 소위 애국자금을 바라는 정치권과 관계를 끊기가 녹록지 않다. 1976년부터 태수가 죽음을 맞는 1988년까지, 그 격동의 시대에서는 그 정도가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의 내레이션에서 우석이 읊지 않던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다음이 문제라고, 그다음에 어떻게 사는지 그걸 잊지 않아야 한다고.
‘모래시계’에서 윤 회장을 비롯해 태수를 장기판 말처럼 부리고, 반항하는 혜린과 우석을 겁박하고, 유신시대와 폭압의 5공 시대를 설계하는 인물 중 하나로 국가안전기획부(일명 안기부) 실장인 강동환(김병기)과 부장 장도식(남성훈)이란 인물이 나온다. 윤 회장의 상납 장부가 세상에 밝혀지며 재판장에 서게 된 강동환은 최후 진술에서 자신은 국가에 헌신했다며 “역사가 나의 충심을 알아줄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구형된 형벌은 고작 징역 4년형. 장부에 이름이 없던 장도식과 스위스 계좌를 통해 돈을 받던 ‘그 어른’에겐 누구도 죄를 묻지 않았다.
지금은 괜찮은 걸까? 2019년의 대한민국에는 또 다른 강동환과 장도식, 또 다른 그 어른, 또 다른 태수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나? 아직도 5.18 민주화운동에 관해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이 나오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상들이 나오는데 말이다. 그리고 내일은 다시 5월 18일이다. 다시는 이 땅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우리는 잊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상식대로 살 수 있기를 바라며.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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