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 5월 7일 화요일 저녁,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홀 안은 수많은 한국인들로 북적였다. 외국인 관객 수도 적지 않았으나 열 명 중 대여섯은 한국인으로, 젊은 층이 주를 이뤘다. 한눈에 보기에도 단순 관객은 아닌 듯한, 베를린에서 음악 공부한다는 유학생들은 죄다 온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콘서트 현장에서 만난 아이의 피아노 선생님에 따르면 과연 그러했다.
이날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독주회가 있는 날. 피아노를 좋아하고 피아니스트라고는 조성진과 김선욱 정도밖에 모르는 아들을 데리고 공연장을 찾은 나는 ‘조성진 형아’를 본다며 기대에 부푼 아들보다 더 들떠 있었다. 한국에서도 그의 공연을 볼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나 비싼 티켓 가격, 그럼에도 순식간에 벌어지는 ‘솔드 아웃’ 사태 등으로 기회가 오지 않았다.
여기서도 게으른 건 마찬가지라 하마터면 놓칠 뻔한 공연을 지인의 발 빠른 예매 덕에 단돈 19유로(약 2만 6000원)에 볼 수 있게 됐으니 어찌 흥분하지 않으랴. 그것도 좋은 좌석에서! 공연 전부터 자랑 삼매경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조성진을? 19유로에? 대~박!”
2시간 동안의 연주는 황홀했다. 유튜브, 음반을 통해 숱하게 보고 듣던 조성진의 피아노 소리를 지척에서, 그것도 숨소리며 디테일한 표정이며, 그 유명한 주먹 타건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
처음엔 자신이 잘 모르는 드뷔시를 연주한다며 불만이었던 아이는 슈베르트 곡 연주를 시작으로 드뷔시로 이어지는 긴긴 시간 동안에도 흐트러짐 없이 눈을 반짝였다. 그간 피아노 독주회도 몇 번 본 적이 있고, 오케스트라 공연도 적잖이 경험했지만 아이에게도 조성진의 연주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공연이 끝난 뒤 물개박수를 치며 감상평을 쏟아낼 때는 어찌나 뿌듯하던지.
음악이 주는 더 없는 행복감에 빠져든 그 순간, 2년 가까이 베를린에 살면서도 생각만큼 많은 공연장에 가지 못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마저 밀려들었다. 베를린살이 시작 때 설레게 한 것 중 하나가 클래식 콘서트였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베를린필을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임기가 끝나기 전 그와 베를린필의 하모니를 들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만으로, 베를린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는 1년에 몇 번,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는 무대를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부러워했던 지인들의 눈빛을 상기하며, 나는 베를린에 가기만 하면 클래식에 빠져 살아보리라 마음먹었다.
헌데, 처음의 그 마음은 갈수록 희석됐다. 매주 화요일, 베를린필 단원의 연주를 무료로 볼 수 있는 런치 콘서트를 비롯해 최고의 공연들을 언제나 볼 수 있는 풍요로운 환경에 살고 있다는 게 변명이라면 변명. ‘다음에 보면 되지’ 하는 생각에 마치 서울 사람들이 한강 유람선을 잘 안 타는 심정으로 다음을 기약하다 보니 사이먼 래틀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의 무대를 보지 못했다. 다행인 것은 베를린에 와서 피아노를 더 사랑하게 된 아들 덕분에 어린이들이 경험하기에 좋은 주말 낮 공연 등은 열심히 다녔다는 점이다.
공연장에 갈 때마다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클래식을 온전히 즐기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 아이보다 어린 유아 관객부터 지팡이 없이는 한 발도 내딛지 못하는 어르신 관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숨죽이며 감상하고 공연 뒤 뜨거운 박수를 한마음으로 쏟아내는 장면들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마저 든다.
조성진 공연과 며칠 뒤 이어진 주말 낮 모차르트 콘서트까지 다녀온 후 아이는 부쩍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취미 삼아 하는 연주지만 좋은 무대를 보고 자극을 받아 자신을 성장시키는 모습을 보면 ‘이런 게 살아있는 교육’이지 싶다. 나 역시 베를린에 처음 올 때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열심히 공연 정보를 뒤지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 아까운 공연들을 놓쳤다며 분명 후회할 것이므로.
조성진이 공연했던 무대에서 6월 12일 ‘살아있는 전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평생 그의 무대를 한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현장 예매 10유로(1만 4000원)부터 팔리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짐머만의 공연을 10유로에 볼 수 있다는 놀라움과 동시에, 그날 베를린 바깥에 있어 공연을 볼 수 없다는 통한의 의미다. 기회는 늘 있지만, 그 기회를 늘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므로 이제부터 달려보기로! 당장 이번 주 금요일 라파우 블레하츠 콘서트를 시작으로 말이다.
글쓴이 박진영은 방송작가로 사회생활에 입문, 여성지 기자, 경제매거진 기자 등 잡지 기자로만 15년을 일한 뒤 PR회사 콘텐츠디렉터로 영역을 확장, 다양한 콘텐츠 기획과 실험에 재미를 붙였다. 2017년 여름부터 글로벌 힙스터들의 성지라는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또 다른 영역 확장을 고민 중이다.
박진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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