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마로 전해지는 바토리 에르제페트는 영원한 젊음을 갈망했다. 에르제페트는 16세기 헝가리 왕가 출신의 귀족이었는데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소한 실수를 한 어린 시녀의 뺨을 때렸다. 그때 우연히 시녀의 피가 에르제페트의 손에 묻었고, 에르제페트는 피 묻은 손이 다시 젊게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 뒤 에르제페트는 젊은이의 피가 젊음을 되찾아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수백 명의 피를 모아 마시거나 목욕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잔인한 기행은 드라큘라 이야기의 영감이 되기도 했다.
전설 속 에르제페트처럼, 우리 은하도 다른 왜소한 은하들의 젊음을 빨아먹으며 영원한 젊음을 갈망한다.
우주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심지어 하늘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거대한 별과 은하 역시 영원하지 않다. 은하가 계속 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재료가 되는 신선한 가스 물질이 필요하다. 하지만 은하가 가진 신선한 가스 물질의 양은 제한되어 있다. 은하가 갓 만들어진 초기에는 왕성하게 가스 물질을 반죽해 새로운 어린 별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가스 물질의 양이 줄어들고 결국 더 이상 별이 탄생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새로운 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떨어지는 노화 과정을 ‘은하의 질식(Galactic Strangulation)’ 또는 ‘은하의 굶주림(Galactic Starvation)’이라고 부른다. 이 현상은 주변에 다른 은하 없이 은하 밀도가 낮은 지역에 외롭게 고립되어 있는 은하(Isolated Galaxy)에서 주로 일어난다. 평균적으로 외로운 은하들의 노화 현상은 약 40억 년에 걸쳐 진행된다.[1]
우리나라는 점점 출산율이 감소하면서 사회 구성원의 평균연령이 늘고 있다. 이처럼 다른 은하들과 상호작용하지 않는 고립된 은하들도 새로운 별이 태어나는 비율인 별 형성률(SFR, Star Formation Rate)이 점점 감소한다. 결국엔 밝고 푸른 젊은 별들은 사라지고 나이 많은 붉고 미지근한 별들만 남게 된다.
하지만 은하들도 다시 ‘회춘’할 수 있는 묘수가 있다. 다른 은하들과 격한 ‘스킨십’을 나누며 은하 간 상호작용(Galactic Interaction)을 하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은하들은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서서히 더 가까워진다. 거리가 아주 가까워지면 두 은하는 하나의 거대한 은하로 반죽되면서 진한 스킨십을 나누게 된다. 스킨십의 양상은 각 은하가 신선한 가스를 얼마나 머금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충돌을 겪는 은하들이 이미 신선한 가스를 대부분 소모해서 가스 물질 함량이 적은 경우에는 스킨십이 격하게 진행되어도 다시 새롭게 별을 만들 재료가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을 ‘건조한 충돌(Dry Merger)’이라고 한다. 이런 무미건조한 스킨십이 벌어진다면 두 은하가 얼마나 강렬한 스킨십을 나누고 있는지 겉으로 티가 잘 나지 않는다.
반면 신선한 가스 물질을 비교적 많이 가진 은하들이 부딪히는 경우에는 많은 양의 가스 물질이 새롭게 반죽되고 충돌하기 때문에 더욱 활발하게 새로운 별들이 태어난다. 이를 ‘축축한 충돌(Wet Merger)’이라고 한다.
은하들이 격한 스킨십을 나누면서 충돌하게 되면, 비슷한 양의 가스 물질을 머금은 다른 은하들에 비해 훨씬 활발하게 별들이 태어나기 시작한다. 주어진 가스와 먼지의 양보다 훨씬 더 높은 별 형성률을 보인다. 이렇게 아주 왕성하게 별들이 태어나는 은하들을 ‘폭발적 별 생성 은하(SBG, Starburst Galaxy)’라고 부른다.
실제로 가까운 거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은하 커플들을 비교해보면, 파트너 없이 혼자 있는 독립된 은하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더 높은 별 형성률을 보인다. 또 커플 은하의 사이가 더 가까워질수록 새로운 별이 태어나는 효율이 더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은하 간 상호작용을 통한 회춘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은하가 서로 충돌하며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가스 물질을 반죽해 새로운 별들을 만들어내면서 그나마 갖고 있던 가스 물질을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소모해버린다. 은하가 서로 충돌하는 초반에 잠깐 새로운 별을 폭발적으로 만들어내지만, 곧 재료가 사라지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노화(quenching)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완전히 늙기 전에 ‘최후의 불꽃놀이’를 하는 셈이다.
최근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은하도 이런 최후의 불꽃놀이를 통한 안티에이징을 계속 시도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우리 은하 내 별들의 미세한 움직임과 정확한 공간 분포 지도를 그리는 임무를 수행 중인 가이아(Gaia) 위성의 관측 데이터를 활용했다. 별들의 정확한 위차 분포와 함께 나이를 확인한 천문학자들은 ‘불과’ 20억~30억 년 전에 아주 많은 젊은 별들이 우리 은하 안에서 왕성하게 태어났음을 확인했다.[4]
이러한 대대적인 안티에이징은 약 20억~30억 년 전 우리 은하 곁을 돌던 작은 왜소 은하가 우리 은하에 충돌하면서 왜소 은하가 머금고 있던 신선한 분자 가스 물질들이 다량 수혈되면서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왜소 은하는 우리 은하처럼 거대한 일반적인 은하에 비해 크기가 작고 별의 개수도 적지만, 새로운 별이 될 수 있는 가스 물질을 훨씬 더 많이 가진 경우가 많다. 지금도 큰 은하들은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왜소 은하를 중력으로 유인한다. 왜소 은하로부터 신선한 가스 물질을 다시 공급받게 되면 훨씬 효율적으로 새로운 별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은하들이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여러 번에 걸쳐 주변의 많은 왜소 은하들을 끌어모으면서 성장한다. 그 덕분에 꽤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꾸준히 별을 만들어내게 된다.
큰 은하와 그보다 약 10배 질량이 작은 왜소 은하들이 충돌하는 마이너 머저(Minor Merger)의 시뮬레이션 영상. 우리 은하를 비롯해 오늘날의 우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거대한 은하들은 모두 최근까지 왜소 은하들을 흡수하며 성장하는 마이너 머저를 겪었다.
우리 은하가 거대한 중력을 통해 주변의 왜소 은하를 유인해 병합해버리는 이런 은하 간 상호작용을 겪지 않았다면 우리 은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노화를 겪었을 것이다. 약 20억~30억 년 전 우리 은하는 태양 주변 영역으로 가스를 많이 머금은 왜소 은하 하나를 끌어들였다. 우리는 바로 그 당시 시작되었던 우리 은하의 별 베이비 부머(Stellar Baby Boomer)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가 매일 밤하늘에서 보게 되는 푸르고 아름답게 빛나는 젊은 별들, 그리고 별들이 한창 새롭게 태어나는 별 탄생 지역의 모습은 아직 우리 은하가 젊음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으며 여전히 성장기를 겪고 있는 활발한 은하임을 보여준다.
고작 100년 남짓의 짧은 생을 살아가는 우리가 수억, 수십억 년의 속도로 벌어지는 우주의 변화를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우주는 정적이고 고요한 세상이며 이제 모든 진화가 다 끝난 최종 완성품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천문학을 연구하면서 매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 우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은하 역시 아직도 꾸준히 성장하며 우리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늘어나는 주름살을 보며 아쉬워하는 우리 인간들처럼 우리 은하도 젊음을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 은하가 주변의 왜소 은하를 모두 집어삼켜버리고 빠르게 다가오는 안드로메다 은하와 아주 격렬한 스킨십을 나누게 된다면 더 이상의 안티에이징은 벌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왜소 은하의 젊은 피를 수혈 받아 찾게 되는 젊음은 천문학적으로 아주 잠깐만 유지될 뿐이다. 결국 언젠가 우리 은하도 더 이상 새로운 별을 만들지 못하게 되고, 서서히 외롭게 소멸해가는 다른 선배 은하들의 전철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우주에 영원한 젊음은 없다. 나와 당신과 밤하늘의 은하수 모두 오늘 밤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
[1] https://www.nature.com/articles/nature14439
[2] https://www.annualreviews.org/doi/10.1146/annurev-astro-081811-125610
[3] https://academic.oup.com/mnrasl/article/433/1/L59/957029
[4] https://www.nature.com/articles/d41586-019-01226-2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사이언스] 우주 팽창의 '불협화음'이 알려주는 것들
·
[사이언스] 천문학계를 들었다놨다 '하룻밤의 중력파 소동'
·
[사이언스] 우주 최초의 '연금술'이 펼쳐지던 순간!
·
[사이언스] '별에서 온 그대'는 진짜 있었다?!
·
[사이언스] 우주 비밀 쥔 '블랙홀' 드디어 눈앞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