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가정의 달이라는 5월, 다들 복작복작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특히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 부모님의 은혜를 되새기는 어버이날은, 부모님께 받은 것이야 태산 같지만 가난한 통장 잔고를 생각하며 얄팍하게 지폐를 더 넣느냐 마느냐 손이 떨리는 날이기도 하다.
중년으로 접어드는 요즘, 부모님을 생각할 때면 이 드라마가 생각난다. 2008년,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였던 ‘엄마가 뿔났다’. 20세기 말부터 보기 드물어진 대가족을 여전히 그리면서도 시대를 적당히 앞지르는 파격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김수현 작가의 장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부모와 남편, 삼남매를 훌륭히 건사해온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어머니상인 김한자(김혜자)가 지난 세월 꿈도 꾸지 못했던 휴가를 한꺼번에 받겠다며 1년간 나가 살겠다는 파격적인 선언을 했던 바로 그 드라마다.
62세를 맞는 한자의 삶은 숨 돌릴 틈이 없다. 책을 좋아하고 가끔은 전시나 영화도 보고픈 문학소녀 스타일이지만 여전히 팔십이 넘은 시아버지를 모시고 있고, 삼시 세끼 무엇을 해먹나 고민해야 하는 주부의 삶. 친딸보다도 며느리의 마음을 더 잘 알아주는 시아버지 나충복(이순재)이 있고, 무던하고 성실한 동갑내기 남편 일석(백일섭)과 시누이 역할보다 가려운 속 긁어주는 친구 역할을 더 잘하는 시누이 이석(강부자)이 있고, 잘난 변호사 딸 영수(신은경)와 속 썩였지만 이제는 세탁소를 하며 자리 잡은 아들 영일(김정현), 순하고 착한 막내딸 영미(이유리)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한자가 원하는 삶 전부는 아니다.
게다가 자식들도 틈만 나면 한자의 마음을 할퀸다. 아들 영일은 다섯 살 많은 미연(김나운)의 존재를 차마 밝히지 못하다 아이 출산 직전에 나타나게 해 한자를 기함하게 만들고, 순하던 막내딸 영미는 가난한 줄 알았던 애인 정현(기태영)이 사실은 부잣집 아들이라 상대 부모 반대로 애를 먹어 한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한자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자란 장녀 영수는 서른여섯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더니 전실 자식이 딸린 이혼남 종원(류진)과 결혼하겠다고 해 한자에게 마무리 펀치를 날린다.
한자가 파격 선언을 하는 것은 62세 생일파티 때다. 하필이면 가족 모두가 한자의 생일을 잊어서 이틀이나 지나 쑥스러운 마음으로 모인 가족들 앞에서, 한자는 시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버지, 전 이 집을 나가고 싶어요.” 41년간 하루도 편하게 살아본 적 없기에 1년간 휴식을 얻겠다는 말에 가족들은 모두 놀라고 어이없어하고 심지어는 한자에게 화를 내고 윽박지른다. 왜 그럴까? 직장에서도 5년, 10년 장기근속 하면 휴가를 주는 마당에 하물며 41년인데 말이다.
모두가 한자의 노고를 인정한다 말하면서도, 그럼에도 한자만큼 좋은 시아버지와 남편이 있는 괜찮은 삶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심지어 딸 영수는 “이왕 희생한 거, 끝까지 희생하라”라는 돼먹지 못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왜? 엄마라서, 엄마니까. 같은 나이의 아버지는 돌아서는 뒷모습만 봐도 쓸쓸하고 서글퍼 보인다는 자식들이, 환갑 넘은 엄마에게는 자기 자식을 돌봐달라는 둥 끊임없이 스스럼없이 요구한다. 드라마를 보던 당시의 나는 한자의 선언이 통쾌하게만 느꼈었는데, 지금은 비통한 절규처럼 느껴진다.
‘엄마가 뿔났다’가 방영됐던 2008년과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금도 지난 세월의 휴가를 한꺼번에 찾아 먹겠다며 집을 나가는 엄마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엄마도, 전업주부도 사람이라며 육아와 가사를 함께하고 가끔씩은 엄마가 아닌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이 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물론 그럼에도, 간만에 집에 갔을 때 엄마가 없거나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 놓지 않았을 때 섭섭해하는 철부지 자식들의 마음은 여전하지만.
‘엄마가 뿔났다’는 전업주부 엄마의 인간 선언 외에도 80대 할아버지의 황혼 사랑, 전실 자식을 둔 재혼 가정의 어려움, “미세스 문~”으로 통용되던 영미 시어머니를 연기한 장미희의 독특한 스타일 등 여러 가지로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가장 뇌리에 남는 건 역시 한자를 연기한 김혜자다. 분명 가족과 자식들에게 헌신하는 모양새는 흔히 보이는 우리네 엄마와 같은데, 엄마도 감정이 있고 한계가 있는 한 인간이라고 온몸으로 보여주는 그 디테일들은 김혜자만이 가능한 연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눈이 부시게’로 얼마 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수상한 김혜자의 연기는 11년 전에도 눈이 부셨다(그해 KBS 연기대상도 김혜자의 몫이었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한자는 임신한 며느리의 컨디션이 안 좋아지면서 결국 예정했던 1년은커녕 4개월도 채 못 채우고 집으로 들어오게 되지만, “너무 좋아”라면서 함박웃음을 지으며 집을 떠나던 순간의 환한 얼굴은 두고두고 기억이 난다. 가족 모두가 모여 즐겁게 윷놀이를 하는 드라마 마지막 회 장면에서, 커피를 마시며 속으로 읊던 한자의 말도 생각난다. 이만하면 괜찮은 삶이니까 감사해야지, 하면서도 다음 생에는 꼭 김한자라는 내 이름 석 자로 불리면서 살아보고 싶다던 내레이션. 그건 이듬해 방영한, 비슷한 대가족을 다룬 ‘
솔약국집 아들들’ 마지막 장면의 어머니 옥희가 말하는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다.
기억하자. 엄마도, 부모님도 여전히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세상에 당연한 사람, 당연한 관계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내년 어버이날에도 또 얼마나 쓸지 손을 벌벌 떨겠지만, 적어도 그 사실만 기억한다면 부모님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이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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