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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라마] 마블 영웅 물렀거라, 우리에겐 '임꺽정'이 있다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 3대 도적…원초적인 힘이 선사하는 통쾌한 스토리

2019.05.03(Fri) 14:16:40

[비즈한국] ‘임꺽정’은 지금 돌이켜봐도 재미난 사극이다. ‘역덕’이기에 궁중암투를 다룬 사극이든, 가끔 허무맹랑하기까지 한 퓨전사극이든, 선 굵은 정쟁을 다루는 정통사극이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너른 마음을 지녔지만 그래도 ‘임꺽정’만큼 독특한 사극을 본 기억은 드물다. 옛날 외갓집에 가면 할머니가 잠 안 자려는 아이에게 두런두런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 같은 느낌이랄까.

 

흔히 조선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을 꼽는다. 각각 연산군, 명종, 숙종 때 활약(?)한 이들은 비슷한 듯 다른데, 홍길동이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음에도 ‘홍길동전’이라는 소설 속 인물로 더욱 유명하여 완연한 옛날이야기의 주인공 같다면 장길산은 홍길동·임꺽정과 달리 알려진 행적이 적고 끝내 잡히지 않아 이야깃거리가 적은 편이다. 반면 임꺽정은 기승전결이 확실한 서사와 현실에 발 디딘 행적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인물.

 

백정 출신으로 남다른 풍채와 덥수룩한 수염이 특징인 임꺽정. 어마무시한 힘과 빼어난 칼솜씨를 바탕으로 여러 부하들을 거느리고 청석골에 패거리를 만든다.  3년가량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한 인물로 실록에도 기록돼 있다. 사진=SBS 홈페이지

 

드라마 ‘임꺽정’은 연산군 시절 귀양 갔다가 도망쳐 백정의 사위가 되는 이장곤(김병세)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장곤이 아내로 얻는 백정 딸 봉단이 임꺽정의 당고모가 된다. 아버지의 사촌누이 봉단은 훗날 연산군이 쫓겨난 후 중종의 배려로 면천되어 양반가 부인이 되지만, 그 곁가지 가족들은 여전히 백정일 수밖에 없다. 아마 이장곤과 봉단이의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우연한 기회로 백정에서 탈출한 친척과 자손 대대로 백정으로 지내야 하는 임꺽정을 비교하고 그 신분차별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는 효과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난 임꺽정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풍채와 힘, 카리스마를 보였다. 양민으로만 태어났어도 무과라도 보겠지만, 천인 중에서도 가장 멸시받는 소백정의 자식이니 그 남다름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백정학자’로 불리며 임꺽정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스승 양주팔이 있었고, 어릴 적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양반가 서자 출신 이봉학과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유복자로 태어난 박유복이라는 절친한 동생이 있었으나 어릴 적부터 기개가 남달라 돼먹지 않은 양반 자식들을 혼쭐냈다가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게 되는 것. 

 

드라마 ‘임꺽정’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주인공 임꺽정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훗날 청석골에 모여 의형제를 맺고 한 패거리가 되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임꺽정과 의형제를 맺고 청석골에 들어선 사람들. 활 잘 쏘는 이봉학, 표창의 명수 박유복, 기막힌 돌팔매질의 배돌석, 빠른 속도의 황천왕동, 쇠도리깨 도적 곽오주, 힘이 장사인 길막봉까지 임꺽정과 칠형제를 맺었고, 그 외에 모사꾼 서림과 청석골의 살림살이를 맡던 오개도치 등이 활약했다. 사진=SBS 홈페이지

 

신궁의 활솜씨를 보이며 현감과 별장 벼슬까지 지냈던 이봉학, 백발백중 표창의 명수 박유복을 비롯해 돌팔매의 귀신 배돌석, 쇠도리깨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곽오주, 임꺽정 못잖은 힘을 자랑하는 소금장수 출신 길막봉, 임꺽정의 처남이자 축지법 뺨치는 빠른 속도의 소유자 황천왕동, 훗날 배신자가 되는 청석골 패거리의 모사꾼 서림과 거짓말쟁이 노밤이 등 주변부 인물들이 왜 청석골에 들어가 도적이 되는지 그들의 전사(前事)를 전래동화처럼 들려주는데, 그게 또 요절복통 기깔나게 재미나고 가슴 아프고 그렇다.

 

각기 재능과 개성을 자랑하는 청석골 패거리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들이 있다. 모사꾼인 서림은 훗날 임꺽정과 함께 실록에 기록된 인물로, 꾀가 뛰어나지만 결국 임꺽정을 배신한다. 임꺽정의 아내 운총은 여자지만 백두산에서 곰과 호랑이를 잡는 천둥벌거숭이 캐릭터로 눈길을 끌었다. 개인적으로 형제 중에선 쇠도리깨를 거침없이 내두르는 곽오주와 신궁의 솜씨를 보인 이봉학이 특히 뇌리에 남았다. 사진=SBS 홈페이지

 

재미난 이야기와 함께 ‘임꺽정’은 가슴이 뻥 뚫리는 호쾌함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마블 영웅들의 초능력처럼 근사한 건 아니지만 원초적인 힘과 달리는 적장의 눈을 꿰뚫는 신묘한 재능이 곳곳에 넘실거린다. 아름드리 생나무를 뽑아버리고 큰 바윗덩어리를 들어 관군에게 던져버리는 임꺽정의 괴력은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든다. 윗도리를 풀어헤친 채 곰 같은 덩치로 다가오는 몇 사람이든 잡아 던지는 그 불끈불끈 치솟는 힘, 테스토스테론의 향연은 화면으로 보는 이조차 온몸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거든. 

 

임꺽정 패거리를 잡기 위해 조정은 근 3년이나 속을 썩여야 했다. 토포사 남치근(김흥기)이 결국 임꺽정을 죽이는 데 성공했으나 서림의 배신이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어려웠을 것이다. 사진=SBS 홈페이지

 

물론 임꺽정과 청석골 패거리는 냉정히 말해 남의 재물을 빼앗는 도적임이 분명하다. 또한 임꺽정 역시 초중반부, 여색과 유흥의 양반놀음에 눈이 뒤집히는 장면도 나온다. 그렇지만 그들을 도적으로 내몬 배경에는 끔찍할 정도의 신분차별과 백성은 나 몰라라, 가렴주구에 빠진 탐관오리와 무능한 위정자가 있음을 ‘임꺽정’은 분명히 보여준다. 도적임에도 임꺽정과 형제들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금 시대에도 그런 응원의 마음은 마찬가지이고.

 

‘임꺽정’​은 임꺽정을 무조건적인 긍정의 인물로 비추지 않았다. 이 장면은 여색과 유흥에 빠져 찾아온 동생들도 외면하는 모습으로, 심지어 자신을 찾아온 아내 운총을 때리는 패악도 서슴지 않았다. 사진=SBS 홈페이지

 

백정 출신 도적 임꺽정을 화려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부활시킨 건 단연 벽초 홍명희의 공 덕분인데, 드라마 또한 홍명희의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이광수,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 3대 천재로 불린 소설가 홍명희의 ‘임꺽정’은 연재 당시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오죽하면 일제 치하에서 수감된 와중에도 유일하게 옥중집필이 허락되었을 정도. 토속어를 생생하게 구사하여 ‘말맛’이 뛰어난 홍명희의 ‘임꺽정’으로 인해 임꺽정은 홍길동과 더불어 영웅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훌륭한 원작도 큰 몫을 했지만 드라마 ‘임꺽정’의 성공에는 소설을 찢고 나온 듯 딱 들어맞는 캐스팅이 일등공신을 했다. 특히 임꺽정 역을 맡은 연극배우 출신 정흥채는, 이보다 더 적합한 임꺽정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더할 나위 없는 싱크로율을 뽐냈다.

 

임꺽정의 처남인 황천왕동과 임꺽정의 아내 운총. 백두산에서 나고 자란 이들 남매는 예의나 학문은 배운 바 없지만 티 없이 순수한 인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사진=SBS 홈페이지

 

그리고 백두산에서 천둥벌거숭이로 자란 임꺽정의 아내 운총을 연기한 김원희! 1995년 ‘장희빈’에서 조용한 인내의 여인 인현왕후를 연기했던 그가 이듬해 말 ‘임꺽정’에서 운총으로 나왔을 때의 놀라움이란. 그 외에도 이봉학 역의 차광수, 박유복 역의 정규수를 비롯해 이정길, 임현식, 전무송, 최주봉, 박인환, 김흥기 등 쟁쟁한 배우들이 열연을 펼쳤다. 제대로 된 발음 구사하는 데도 애를 먹는 요즘 배우들이 보고 공부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라고.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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