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나비에겐 쌉싸름한 나무가 있다

[비즈한국] 음악과 디저트에는 공통점이 있다. 건조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입가심하기에 적당하다는 것. ‘가토 드 뮤지끄(gâteau de musique)’는 우리에게 선물처럼 찾아온 뮤지션과 디저트를 매칭해 소개한다.

갑자기 떴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나만 모르고 있던 경우가 있다. 인터넷을 이렇게나 열심히, 많이 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억울한 기분이 들지만 음악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 지금이라도 잽싸게 들으면 된다. 하지만 전국 투어 콘서트는 끝났다.

잔나비 -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

참으로 간만에 듣는 나무의 소리다. 나무로 된 기타, 베이스, 드럼. 얼마 전에 유행했던 레트로는 1980~1990년대 신스팝, 시티팝이었다. 잔나비는 우리의 고막을 잡고 그보다 훨씬 더 이전인 1970~1980년대, 그러니까 팝의 중심에 밴드가 있었던 시절로 끌고 간다.

마침 이런 소리, 그리고 찰랑이는 곱슬머리와 어울리는 가토(Gateau, 케이크)를 기억하고 있었다. 발걸음은 다시 연희동으로 향한다.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 이렇게 뚜렷한데 괜히 주저했다간 ‘솔드아웃’을 마주칠 것이다.

갑자기 뜬 이름을 검색하면 어김없이 그 이름이 차곡차곡 쌓은 기나긴 커리어와 마주친다. 자주 다니는 길 중간에 있는 아파트 건설현장과도 같다. ‘저 건물이 언제 올라갔지?’ 싶지만 나만 몰랐지 많은 사람들이 적당한 시간을 들여 열심히 지은 건물이다.

잔나비의 첫 번째 노래, ‘로켓트’

재인에서 나무를 주문하면 내 앞에 자그만 나무토막 하나가 놓인다. 어찌나 이토록 집요하게 나무토막을 재현했단 말입니까, 감탄하며 포크 끝으로 나무 모퉁이를 살짝 찌른다. 표면을 두른 얇은 초콜릿을 조심스레 덜어내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초콜릿 무스가 나온다. 무스가 아슬아슬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다.

토독토독, 창가를 두들기는 밤비 같은 윤결의 드럼소리에서 잔나비의 음악이 시작된다. 빈백(Bean Bag)처럼 포근한 장경준의 베이스에 몸을 뉘이고, 호다닥호다닥 장난감을 갖고 노는 고양이처럼 활기 넘치는 김도형의 기타소리를 본다. 하이볼이 든 컵을 살살 돌리면 얼음과 컵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나는데 그것이 바로 유영현의 키보드. 이윽고 보컬 최정훈의 잘생긴, 아니 잔잔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친 나를 감싸 안아줄 그대.

잔나비 - She

초콜릿의 향을 가둬두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바로 이 초콜릿 무스 아닐까. 파티시에가 심혈을 기울여 봉인한 진한 초콜릿의 향기는 무스가 내 혀에 닿는 순간 비강을 가득 채운다.

초콜릿 무스 사이에서 짙은 갈색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맛있는 가토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아니 이건 송진 아닌가.

송진의 정체는 솔티 캐러멜이다. 짜고 달고 쌉싸름하다. 고소한 헤이즐넛 프랄리네(Praline:견과류를 설탕에 졸인 것)가 오독오독 씹힌다. 기억 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초코 아이스크림이, 초코바가 떠오른다. 재인의 ‘나무’는 그 동안 우리가 초콜릿으로 겪었던 즐거운 기억을 모조리 되살려 풍성하게 전해준다.

잔나비 - Summer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잔나비의 음악은 아련한 옛 추억, 거기서 더 나아가 심지어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의 가상 추억까지 소환되는 듯한 마력을 지녔다. 쌉쌀하지만 향긋한 초콜릿처럼, 씁쓸하지만 달콤한 캐러멜처럼, 잔나비는 우리의 처절했던 추억을 달콤한 전설로 만들어 줄 테다. 헤어진 이야기에 자꾸 재생버튼을 누르는 이유는 그래서다.

필자 이덕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두 번의 창업, 자동차 영업을 거쳐 대본을 쓰며 공연을 만들다 지금은 케이크를 먹고 공연을 보고 춤을 추는 일관된 커리어를 유지하는 중. 뭐 하는 분이냐는 질문에 10년째 답을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