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해 9월, LA 다운타운에 있는 회사 사무실에 출근하는 길이었다. 아침 이른 시각에 전에는 본 적 없는 광경이 눈을 끌었다. 회사 빌딩 앞에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이 늘어 서 있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걸까. 각종 밤샘용 장비를 탑재한 초췌한 모습을 미루어 보건대, 적어도 어젯밤은 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분명한 젊은이들의 행렬은 무려 두 블럭이나 떨어진 LA Live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그중 한 사람을 붙잡고 왜 여기에 줄을 서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돌연 눈을 반짝이며 대답해주었다.
“They sell BTS’ merchandises!(방탄소년단 굿즈를 팔거든요)”
아니, 방탄소년단이 콘서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직접 와서 사인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관련 굿즈를 팔 뿐인데 이렇게 긴 줄을 서 있다고?!
방탄소년단의 인기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눈 앞에 펼쳐진 긴 행렬을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업자’로서, 지금 당장 사무실로 들어가서 파헤쳐보고 싶을 만큼 궁금증이 일었다.
‘미국 인구의 몇 퍼센트가 케이팝(K-Pop) 팬일까?’
# ‘스타’의 등에 올라탄 마케팅
이렇게 피부에 확확 와닿는 슈퍼팬(Super Fan)들의 파워, 혹은 TV 프로그램 등의 인기에서 즉각적으로 확인되는 대중의 열렬한 반응에 많은 기업들이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마케팅을 하곤 한다. 이른바 ‘스타’라는 거인의 등에 올라타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광고주들의 스타 몸값 베팅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늘 생각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걸리버 이야기’다. 소인국 릴리퍼트에서 그는 산 같은 거인이지만, 거인국 브롭딩낵에서는 보잘 것 없는 소인일 뿐이다. 인기란 ‘걸리버’처럼 지역, 시기, 대상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인기는 한 단면일 뿐인 것이다. 여기에 고무되어 무턱대고 마케팅 사업을 확장해 나가는 것은 큰 무리수가 있다. 거인인 줄로만 알았던 걸리버의 등에 업혀 간 곳이 브롭딩낵이면 어쩔 텐가!
미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시장에서 K-Pop의 가능성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 수도, 반대로 한 지역이나 그룹에 한정된 니치 마켓(Niche Market: 틈새 시장)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시장 규모와 타깃의 성향에 따라서 마케팅 전략의 스케일과 목표는 크게 달라지게 된다. 마켓사이징 연구는 이러한 사업 전략을 짜는 데 객관성을 부여한다. 단순히 콘서트장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경도되어 ‘촉’으로 짜는 전략이 아니라 데이터에 근거하여 솔루션을 찾아가는 것이다.
# 미국에서 케이팝·케이뷰티 인구는 얼마나 될까
자, 그렇다면 이제 실전을 들여다보자. 미국 젊은 층 기준으로 K-Pop의 인지도는 어느 정도일까?
우리나라에서 X세대, 386세대 등 특정 나이 집단을 지칭하여 사회적 의미 부여를 하듯, 미국에서는 베이비붐 세대(Baby Boomers), X세대(Gen X), 밀레니얼 세대, Z세대(Gen Z) 등으로 세대를 나누어 마케팅 전략에 활용한다. 1982~2004년에 태어난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 1939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다수의 밀레니얼(63%)이 K-Pop을 들어본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10명 중 1명꼴로 K-Pop의 팬이다(출처: 2017 마인엠알 Millennial Tracker).
미국 통계청(The United States Census Bureau)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밀레니얼의 인구는 8310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미국의 밀레니얼 K-Pop 팬들은 914만 명 정도로 산정할 수 있다.
K-Pop이 창출하는 가치는 엔터테인먼트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K-Pop의 인기와 더불어 커지는 시장 중 하나는 K-Beauty이다.
몇 년 전부터 미국의 대표 화장품 판매 체인인 세포라(Sephora)에서 한국 토종 브랜드들을 살 수 있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었다. 조사에 따르면 미국 밀레니얼 전체에서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45%가 K-Beauty에 대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들어봤고, 밀레니얼의 8%가 K-Beauty를 이용한다고 한다(출처: 2017 마인엠알 Millennial Tracker).
다수의 한국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나 한국 화장품 브랜드들이 미국 진출을 꾀할 때, 이러한 시장 규모의 현실적 정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물론 미래 가능성을 정확하게 측정한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객관적인 데이터에 기반한 예리한 전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엄청난 경제적 이익 혹은 미리 방지할 수 있는 리스크를 생각하면 신제품 출시 전에 집요하게 조사해야 한다.
시장 규모를 추정하는 마켓사이징 연구의 중요성과 관련된 유명한 사례가 있다. 1983년 미국의 컨설팅업체 맥킨지(McKinsey)는 클라이언트 AT&T(미국 메이저 통신업체)에게 2000년 휴대폰 이용자가 90만 명 정도에 그치는 틈새시장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AT&T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수용해 투자를 포기했다. 지금은 전설(?)이 된 맥킨지의 이 부정확한 수치와 달리, 그해 휴대폰 이용자는 무려 1억 800만 명에 이르렀고, AT&T는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업계 괴담이 되었다.)
#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미국 내에서 마켓사이징이 특히 많이 쓰이는 곳은 실리콘밸리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들이 투자자들을 상대로 IR(Investor Relations) 활동을 할 때 궁극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사항은 시장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켓사이징은 큰 규모의 정량 조사를 미국 인구에 근거하여 추진, 현재 개발 중인 상품의 타깃 마켓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측정한다. 궁극적으로 마켓사이징은 기업의 수익 가능성, 기업 경쟁 차별화 전략, 마케팅 전략, 소비자 트렌드 등등 기업 성장에 기본이 되는 모든 요소를 아우르는 결정적인 리서치인 것이다.
그러나 마켓사이징이 그 회사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수의 회사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비즈니스모델도 진화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아마존(amazon.com)의 시작은 ‘책 장사’였다. 지금은? “세상의 모든
것을 팝니다(The everything store)”를 표방하는 인터넷 최고의 소매업체가 되었다.
페이스북은 또 어떤가.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없던 광고서비스는 지금 페이스북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 요소이다. 이런 이유에서 마켓사이징 또한 회사가 발전하면서 시장의 현 주소에 맞게 다시금 재검토되어야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아무리 시장이 변화무쌍하더라도 그것을 측정하는 기본 요소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만 오늘날과 같은 ‘기하급수의 시대’에는 산술급수적 방법론이 아닌, 기하급수적 사고와 측정, 트렌드에 대한 유연한 수용이 필요하다.
카네기멜론 경영대학 첫 마케팅 강의에서 교수님이 이런 얘기를 했다. “가끔 숫자가 싫어서 마케팅을 한다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인사관리 쪽으로나 가봐라.”
‘감’은 우리를 속일 수 있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Numbers don’t lie).
필자 황지영은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엔터테인먼트 경영 석사를 마치고 Fox Television, Warner Bros. Television 리서치 부서에서 일했다. 글로벌 소비자 마케팅 리서치 회사 Hall & Partners, Kelton Global에서 경력을 쌓고 2015년 소비자 마케팅 연구 회사 마인엠알(MineMR)을 설립, 현재 미국 LA에서 글로벌 기업들을 클라이언트로 소비자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황지영 MineMR 대표·마케팅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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