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그동안은 최근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하여 유니콘 반열에 등극한 프랑스와 유럽의 스타트업들을 소개했다. 이들은 대부분 플랫폼 기반의 모빌리티 혹은 O2O(Online to Offline) 사업자들이다. 시장의 경직성이나 규제 등으로 인해 간과되는 수요를 사업화한 뒤 경쟁자들보다 빠르게 사용자 기반을 확보해 네트워크 효과를 선점, 새로이 형성된 시장의 플랫폼을 장악한다. 빠른 실행력과 시장을 앞서는 새로운 감각, 신속하고 유연한 대응이 경쟁력이다. 종종 창업자를 비롯한 구성원들의 나이가 놀라우리만치 젊다는 것 또한 공통점이다.
오늘 소개하는 스타트업은 여러 면에서 이들과 차이를 보인다. 고압 수전해 기술을 활용한 수소 생산 장치를 소형 모듈에 담아 이동성을 높인 프랑스의 에르고숩(Ergosup)이 그 주인공이다.
2012년 창업 이후 꾸준히 기술 안정화와 시장성 확보에 주력하다가 올해 2월에 1100만 유로(140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여 본격적인 상용화를 준비하고 있다. 이 회사의 창업자들은 모두 수십 년간 대기업에서 연구 개발 활동에 몰두한 베테랑들로, 창업자 3인의 평균 나이가 60대이다. 보통의 프랑스인이 은퇴를 준비하거나 이미 여유로운 노후 생활에 접어들었을 나이다.
수소는 에너지원 또는 저장 매체로서 다양한 장점이 있지만, 현재의 기술과 산업구조에서는 생산·유통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한계도 있다. 한국에서도 최근 정부의 ‘수소경제 로드맵’ 발표 등과 맞물려 경제계 전반의 관심이 쏠리지만, 여전히 기술적·상업적 논란이 뜨겁다.
먼저 수소 에너지가 과연 친환경적이냐 하는 문제이다. 현재 생산되는 수소는 대부분 화석연료, 즉 탄화수소의 정제 과정에서 얻어진다. 기존 생산 기반을 활용해 수소를 대규모로 생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온실가스가 발생한다.
반면 수전해 방식의 수소 생산은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으나, 전기 에너지를 얻기 위해 수소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전기를 사용한다는 모순이 있다. 에르고숩은 산소와 압축 수소의 수전해 과정을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를 보완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적어도 소형 수소 생산 장치로서는 수전해 방식의 한계를 상당 부분 극복했다.
다음으로는 수소 에너지의 활용을 위해 필요한 충전소 네트워크의 확충 문제가 있다. 에르고숩의 수소 생산 모듈은 업소용 냉장고만 한 크기로 이동 설치가 가능하다. 충전소 네트워크를 위한 대규모 인프라 투자가 필요없는 것. ‘수소가 필요한 곳에 가서 수소를 생산한다’는 개념이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한국의 수소 경제에 관한 논란이 ‘수소자동차’라는 한정된 응용 분야에 지나치게 국한되어 있는 것 같다. 자동차 산업이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축 가운데 하나임에도 유럽과 북미에 비해 전기자동차 등 내연기관을 대체하는 이동 수단의 보급이 뒤처지다 보니, 수소자동차가 전기자동차의 대안으로 여겨지는 것이 하나의 이유인 듯싶다. 하지만 전기에너지의 생산과 저장 수단으로서 수소의 응용 분야는 자동차뿐만이 아니다.
가령 현대자동차의 수소자동차 넥쏘가 한 번 충전에 600km를 달릴 수 있다고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6kg의 수소 탱크를 채워야 한다. 에르고숩의 소형 모듈은 하루 1kg 정도의 수소를 생산할 수 있으니 수소자동차 충전소로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전기자전거 충전소라면?
자전거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는 전기자전거가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수소 연료 전지를 활용한 전기자전거는 30g 충전으로 100km를 달릴 수 있으며, 충전 시간도 채 1분이 걸리지 않는다. 하루 30~40대의 전기자전거를 빠르게 충전할 수 있다면, 자전거 공유 서비스의 충전 스테이션으로서 도심 내 모빌리티를 효율적으로 보완하는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에르고숩은 전기 자전거 스타트업인 프라그마(Pragma), 에이치투테크(H2Tec)와 함께 프랑스와 북미 지역에서 전기자전거 공유 시범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또다른 응용 분야는 드론이다. 비행 물체인 드론의 에너지 효율은 첫째도 경량화, 둘째도 경량화다. 2차 전지에 비해 현저히 가벼운 수소 연료 전지를 사용하면 드론의 비행 시간을 4배 가량 늘릴 수 있다고 한다. 역시 프랑스의 산업용 드론 스타트업인 들레어(Delair)와 함께 비행 시간을 4시간까지 늘리는 솔루션을 공동 개발 중이다.
전기자동차의 활용도를 이야기할 때 1회 충전 시 주행 거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데, 산업용 드론의 1회 충전 비행 가능 시간은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들레어를 비롯한 산업용 드론은 농업, 산림 감시, 국방, 유전·광산 개발, 전력망·철도망 관리, 국방 등의 분야에서 항공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래서 1회 비행 가능 거리가 응용 범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에르고숩의 수소 생산 모듈은 수소 충전 네트워크의 설치가 불가능한 광산이나 유전 지역 등의 오지에 운반되어 현장의 항공 데이터를 수집하는 드론들의 이동식 충전소로 활용이 가능하다.
이외에도 에르고숩은 수전해 방식의 이동식 수소 생산 모듈이 다양한 응용 분야에 활용될 수 있으며, 2차 전지 배터리와 배타적으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인 대안임을 강조한다. 경제와 사회의 패러다임을 다음 단계로 진화시키는 과정은 한두 가지 기술과 응용 분야보다는, 다양한 요소가 보완적으로 시스템을 강화해 총합적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요소 기술의 경쟁력 우위를 확보하는 것뿐 아니라 전체 시스템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융합적 사고가 점점 중요해지는 것은, 비단 수소 경제뿐이 아닐 것이다.
에르고숩의 창업자이자 CEO인 파트릭 파이에르(Patrick Paillere)는 1980년대 초에 프랑스 남부 알프스 지방의 과학 도시인 그르노블에서 전기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30년 가까이 프랑스의 국영 에너지 기업인 아레바(Areva)에서 일했다. 연구 개발뿐 아니라 자재 구매 및 생산 공장 운영 등 다양한 업무의 요직을 거쳤다. 50대 중반에 접어들던 2009년부터는 핵연료의 운송과 물류에 특화된 자회사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사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대기업 간부가 후배들에게 요직을 내주고 자회사의 대표를 맡는 것은 은퇴를 앞둔 수순이자 보상성 인사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2011년 회사를 박차고 나와 2012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의 셸부르 지역에서 에르고숩을 창업했다.
1957년생으로 올해 62세인 그가 과연 언제까지 이 스타트업을 이끄는 노익장을 과시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필자 곽원철은 한국의 ICT 업계에서 12년간 일한 뒤 2009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현재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 담당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8년 한-프랑스 스타트업 서밋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기재부 주최로 열린 디지털이코노미포럼에서 유럽의 모빌리티 시장을 소개하는 등 한국-프랑스 스타트업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곽원철 슈나이더일렉트릭 글로벌전략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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