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선덕여왕’ 때문이다. ‘히트’ ‘뿌리깊은 나무’ ‘육룡이 나르샤’ 등 김영현, 박상연 작가 콤비의 작품을 대부분 좋아하는데, 그래도 ‘선덕여왕’을 첫손에 치는 건 매혹적인 캐릭터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현정이 연기한 미실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유튜브에서 ‘선덕여왕 명장면’ 같은 제목을 잘못 누르면 10년이 지났음에도 또 밤잠을 설치는 거다.
‘선덕여왕’은 한국 사극에서 잘 다루지 않았던 신라시대 첫 여왕인 선덕여왕이 어떻게 왕위에 오르고 시대를 지배하는지를 보여준다. 김영현 작가가 썼던 ‘대장금’도 있었지만 사극에서 여성 서사, 그것도 궁중암투가 아닌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다룬다는 건 분명 눈에 띄는 시도였다(‘명성황후’가 있었지만 어쨌든 왕비였고, ‘선덕여왕’ 직전 ‘천추태후’도 방영했지만 결과나 평이 좋지 못했다).
조선, 고려에 비해 자료도 많지 않은 신라가 배경인 데다 팩션사극이라는 장르상 과한 설정이 많은 편이다. 훗날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이요원, 아역 남지현)은 천명(박예진, 아역 신세경, 김유정)과 함께 쌍둥이로 태어나는데, 왕이 쌍둥이를 낳으면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른다는 뜻의 ‘어출쌍생 성골남진’이라는 불길한 예언이 있어 출생 직후 빼돌려져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에서 성장한다.
훗날 왕이나 영웅이 되는 인물이 어릴 적 출생의 비밀을 품은 채 고생을 겪는다는 성장 스토리가 유독 사극에 많긴 하지만, 일국의 공주가 한반도를 벗어난 타국에서 자란다는 설정은 스케일이 남다른 편이었다. 애초 진위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모티브를 얻은 ‘선덕여왕’은 상당수 인물의 활동 연령대를 다르게 설정하는 등 역사왜곡 논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국민드라마’가 되었다.
국민드라마로 등극할 수 있었던 건 단연 출연진의 빼어난 연기 덕. 흔히 연극을 배우의 예술, 드라마를 작가의 예술, 영화를 감독의 예술이라 한다. ‘선덕여왕’도 논란은 있을지언정 독특한 설정과 귀에 콱 박히는 좋은 대사, 지금도 종종 쓰이는 BGM(배경음악) 등 여러 장점이 많았지만 그래도 세 꼭지점 중 두드러지게 돌출돼 보이는 건 단연 연기였다.
타이틀 롤을 맡은 선덕여왕 덕만 역의 이요원, 김유신 역의 엄태웅부터 첫 회 진흥왕을 맡아 카리스마를 선보인 이순재, 진평왕 역의 조민기, 상대등 을제 역의 신구, 마야부인 역의 윤유선, 진평왕의 시녀이자 덕만의 양모인 소화 역의 서영희, 미실의 남편인 세종 역의 독고영재, 미실의 정부인 설원 역의 전노민, 미실의 동생 미생 역의 정웅인 등 경력이나 연기력에 있어 인정을 받는 수많은 배우들이 출연했다.
낮은 비중으로 존재감이 덜했지만 미실의 찌질한 아들 하종을 맡은 김정현이나 밉상 화랑 석품을 연기한 홍경인도 후덜덜한 구력을 자랑하는 배우들. 그뿐인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묘한 인물인 비담을 연기한 김남길 같은 경우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로 거듭났다.
그리고 미실 고현정. 많은 사람들이 미실이 퇴장하는 50회까지는 드라마 ‘미실’이었고 이후부터가 진짜 ‘선덕여왕’이라고 말할 정도로 독보적인 연기를 펼친 고현정이 없었다면 ‘선덕여왕’의 성공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온몸으로 체화한 미실 캐릭터는 악역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덕만을 제치고 진주인공 역할을 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해 연기대상 대상을 거머쥔 건 당연했다. 입꼬리와 눈짓, 눈썹 등 얼굴 근육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감정연기가 얼마나 매혹적이었던지(미모는 두말하면 입 아프니까 관두자)! 미실이 던지는 수많은 명대사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래요, 신라는 미실님이 가져야 해요”라고 주절거렸을 정도였다고.
‘선덕여왕’은 신라라는 나라의 통치 자리를 두고 덕만과 미실의 대립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에 필연적으로 정치자의 덕목과 그들이 추구하는 리더십에 대해 다뤘다. 시청자들이 ‘6분 토론’이라고 명명했던 장면이 대표적이다. 천문을 이용해 권력을 누리던 미실에게 덕만이 첨성대를 지어 백성 모두가 천기운행을 알게 하겠노라 선언하자 미실이 조용히 분노한다.
“공주님, 세상은 종으로도 나뉘지만 횡으로도 나뉩니다.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딱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 세상을 횡으로 나누면 공주와 저는 같은 편입니다. 우린 지배하는 자입니다. (중략) 우리는 정쟁을 하고 있습니다. 정쟁에도 규칙이 있는 것입니다. 이건 규칙 위반입니다.”
이 대사에서 우리는 당파가 달라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무섭게 결집하는 정치인들의 논리,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심리를 읽었다. 토론을 끝내는 미실의 대사도 인상적이다. “미실은 환상을 이야기하고 공주님께선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허나 그 희망이라는 것이, 그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가장 잔인한 환상입니다.” 환상을 조장해서 사익을 추구하는 정치인들도 싫지만, 때로 진실과 희망과 꿈을 버거워하고 외면하는 것도 사실인지라 유난히 뼈아픈 대사였다.
지도자에게 얼마나 큰 책임이 따르는지, 지도자의 삶이 얼마나 외로운지 읊었던 대사도 기억난다. 왕이 되겠다는 덕만에게 김유신은 이렇게 말한다. “너한테 배웠거든. 지도자는 항상 따르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고. 그러니 나도 그럴 것이다. 난 항상 요구할 거고, 넌 어둠 속을 혼자 걸어가면서 헤쳐 가야 해.” 지금은 제왕이 다스리던 시대가 아니니 다소 느낌은 다르겠으나 지도자의 힘듦을 잘 표현했다고 본다.
사람을 얻는 자가 시대를 얻는다고 ‘선덕여왕’은 말했다. 마력의 권력자 미실은 매혹의 카리스마와 극도의 공포로 사람을 얻었고, 이상적인 지도자로 그려진 덕만은 진실과 희망, 신의와 꿈을 공유하며 사람을 얻었다. 물론 덕만의 그것이 정답이란 건 아니다. 시대에 따라 요구되는 리더십은 달라지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어떤 덕목을 갖춘 리더를 뽑아야 할지, 리더가 되고자 하는 자는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얻어야 할지 서로 매순간 치열하게 고민할 밖에.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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