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중국 한 무제(漢 武帝, 재위 기원전 141~87년)는 고조선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민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가 추진했던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대 중국의 왕조들이 번번이 북방 유목민족에게 패배하고 또 정복당했지만, 한 무제만 역사에 남을 승리를 거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오랫동안 이 의문을 풀지 못했는데, 최근에 읽은 책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덕분에 상당 부분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기원전 121년 한 제국은 흉노와 싸워 크게 이겼고, 이후 오늘날 실크로드라고 일컬어지는 무역로를 따라 곳곳에 군사 주둔지를 설치했다. 주둔지를 모두 연결하면 그 길이가 무려 1000km에 달했다. (중략) 이 같은 무제의 군사적 승리를 뒷받침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중략)
무제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재정 전략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상업에 밝은 인재를 등용했다. 당시 한 제국의 농민들은 빈곤한 상태였기에, 인두세나 토지세를 인상하는 것은 대책이 될 수 없었다. -책 216~217쪽
세금 인상 없이 어떻게 전쟁비용을 조달했을까?
첫 번째 조치는 기존에게 상인에게만 부과되던 상거래 세금을 모든 거래 당사자에게 보편적으로 확대 적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정책을 산민(算緡)이라고 했다. 누구라도 상거래에 참여하거나 고리대금업을 하려면 자산 2000전(錢)당 세금 120전을 내야했다. (중략)
두 번째 조치는 소금 및 철광 산업을 국가가 독점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는 민간 영역의 생산품 중 가장 수익성이 좋다고 여겨지던 상품이었다. (중략)
세 번째 조치는 무게가 더 나가는 새로운 동전 오수전(五銖錢) 주조였다. (중략) 초기에는 여러 지방에서 주조되었고, 생산지에 따라 무게와 정교한 정도가 상당히 차이가 났다. 기원전 113년부터는 수도에서 수형도위(水衡都尉)라는 부서에서 오수전 주조를 관장했다. 이때부터 무제의 남은 임기 동안 상당히 많은 양질의 동전(4.0~4.5g)을 주조했는데, 연 생산량이 약 4억 문(文)에 달했다. (중략) 무제는 마침내 유통 화폐를 통일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표준 화폐는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책 218~220쪽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고분(古墳)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파악할 때 가장 도움이 되는 지표 유물이 오수전이다. 그만큼 많이 발행되었고 또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화폐경제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당시 한 제국은 로마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오수전이 단일 통화 표준으로 성공하자, 한 제국에도 신뢰할 수 있는 지불 수단이 마련되었다. 동전 생산이 계속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한 제국의 화폐경제 비중은 로마 제국보다 낮았다. 한 제국의 기원전 1세기 1인당 화폐 수는 로마 제국 전성기에 비해 거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중략)
한 나라에서는 전체 동전 유통량 가운데 30% 남짓을 정부 세금 수납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이와 달리 로마에서는 세금 수납에 사용된 동전의 비중은 10% 미만이었다.
게다가 공급된 화폐의 구성 비율 또한 한 제국은 로마 제국과 전혀 달랐다. 기원후 로마 제국에서 유통되던 화폐의 비중은 가치 기준으로 금화가 60%, 은화가 30~35%, 동전이 5~10%였다. 반면 한 제국에서 유통되던 화폐는 거의 전부가 가치가 낮은 동전이었다. -책 226쪽
즉 한 제국이 만들어낸 화폐, 오수전은 거래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 ‘가치저장’의 수단이 되지는 못했던 셈이다. 그럼 왜 한 제국은 금이나 은으로 화폐를 만들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일본 미야자키 이치사다 도쿄대 교수는 ‘중국 중세사’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그는 군사적 성공이 화폐경제의 발전을 오히려 제약한 면이 있다고 본다. 즉 비단길을 통해 서역으로 비단이 팔려나가기는 했지만, 대신 말을 비롯한 각종 군수물품의 수입을 위해 지출되는 귀금속의 양이 더 많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많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흥미로운 문제제기임에 분명하다.
한 무제의 군사적 성공과 재정 팽창은 보수세력의 반발에 직면하고 만다.
(무제의 사후에 열린 토론회인) 염철회의(鹽鐵會議)에 참여한 반대파 학자들은 보수적인 주장을 반복했다. 즉 부의 원천으로서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윤추구의 부도덕성을 비판했다. 그들이 보기에 국가는 백성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익을 얻는다. 그래서 국가가 세수를 늘리는 것은 곧 관리 고유의 의무, 즉 백성을 정신적·물질적으로 보호하는 역할로부터 이탈시키는 것과 같다. 또한 이들은 정부 관리가 힘없는 백성을 쥐어짜면서 시장과 상품과 세금 등에 대한 재량권을 남용한다고 비판했다. -책 235쪽
결국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昭帝)는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줄이는 방향으로 전환했고 심지어 기원전 44년에는 오수전을 비롯한 모든 금속 화폐의 철폐를 추진하는 주장이 득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상화 같은 정책 전환은 한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황제의 재정적 여력이 축소되었고, 토지 소유와 부의 집중화 현상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화폐경제의 후퇴가 토지 소유의 집중을 낳은 이유는 바로 ‘거래의 감소’ 때문이었다. 상인들은 식량을 비롯한 다양한 생필품의 수요와 공급을 판단해, 식량이 풍부한 지역에서 희소한 지역으로 이동시킴으로 이익을 얻는다. 반면 상인들의 활동이 위축되고 화폐경제가 무너지는 순간, 특정 지역에서 필수품의 생산을 장악한 대지주와 귀족이 득세할 수밖에 없다.
한 무제 사후에 벌어진 역사적인 후퇴를 보며, 마음이 불편한 사람이 적잖을 듯하다. ‘이윤추구의 부도덕성’을 비판하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각종 규제를 통해 상거래가 제약되고 지역 간 이동이 줄어들 때 누가 이익을 보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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