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2009년에 창업한 프랑스의 시그폭스는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 분야의 선두주자다. 저전력 원거리 통신망(LPWAN) 기술을 기반으로 스마트홈의 알람이나 냉장고 같은 가전 제품,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는 기계장치, 스마트 시티의 가로등을 비롯한 온갖 장치와 사물을 연결하고 감시하고 제어하는 글로벌 통신망을 구축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IoT는 4차 산업혁명이 논의되는 21세기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광범위한 기술 가운데 하나다. 전 세계 기술 관련 기업은 물론이거니와 유통·물류·서비스·농업 등 분야를 막론하고 IoT에 한발 걸치지 않은 회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시그폭스가 두드러지는 이유는 일찌기 저전력, 저비용, 저성능이라는 역발상의 IoT 네트워크를 구상하였다는 점이다.
시그폭스의 공동창업자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푸르테는 기업가 정신이나 창업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보수적인 엔지니어 출신이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전자통신장비업체 사젬(SAGEM)에서 5년 일한 뒤 1994년부터 모토롤라 프랑스 지사의 툴루즈 연구소에서 15년간 이동통신·반도체 기술자로 일했다.
모토롤라 반도체 사업부가 2003년 프리스케일로 분사하면서 소속이 바뀌었을 뿐 한 번도 이직하지 않고 같은 회사의 같은 부서에서 묵묵히 전파 기술을 연구했다. 20년간 한 우물을 판 이력은 스타트업 창업자의 프로필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푸르테가 IoT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8년쯤부터. 모두가 IoT가 가져다줄 ‘멋진 신세계’에 대해 말했지만, 그가 보기에는 기술적인 한계가 명확했다. 집 안에서 TV를 와이파이(wifi)에 연결하는 것과, 수십만 개의 센서를 도시 전역에 설치하고 연결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전혀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다.
전자통신업계는 무어의 법칙에 따라 더 빠르고 더 강력한 칩과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 집중했다. 기기당 비용과 에너지 소비의 증가는 기술 발달에 따라 자연히 해결될 거라고 본 것. 반면 푸르테는 IoT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를 해소하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자통신 기업들에서 오랫동안 일한 그는, 지금처럼 인터넷망과 반도체·전력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도 소량의 정보를 극히 적은 에너지로 상당히 먼 거리까지 보내는 전파 기술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기술은 쉽게 말하자면 천체물리학에서 사용되는 전파 망원경과 유사하다. 수억 광년 떨어진 별에서 지구까지 전해오는 미세한 전파를 포착하는 기술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최초의 잠수함들이 심해에서 교신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기계 간 통신의 오래된 숙제를 풀 방법을 찾았으나 이를 사업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수십년 동안 대기업의 연구실에 틀어박혀 기술에만 몰두해온 푸르테에게 창업은 딴 세상 얘기였다. 벤처캐피털이 뭔지도 몰랐다. 그러던 2008년 푸르테는 툴루즈의 한 카페에서 운명처럼 루도빅 르모앙을 만난다. 조용한 기술자인 푸르테와 시끌벅적한 연쇄 창업가인 르모앙은 성격이 극과 극이었으나 의외로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다. IoT를 주제로 토론을 하면서 두 사람은 즉각 예감했다. ‘아,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겠구나!’라고. 그렇게 두 사람은 2009년 시그폭스를 창업한다.
공동창업자인 루도빅 르모앙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역의 항구 도시인 르아브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나고 자랐다. 아버지는 공사 현장에서 전기기술자로 일하며 서민 아파트에서 세 아들을 키웠다. 아버지를 따라 착실히 노동자로 성장한 두 형과 달리 루도빅은 어린 시절부터 현실에 대한 불만과 반항기가 강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항구를 어슬렁거리며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급기야 고등학교를 중퇴한다. 이후 아버지와 형들의 권유로 직업자격증 시험을 치르지만 떨어지고 만다.
학교와 규율을 못 견뎌했지만 최소한 머리에는 자신이 있었던 그는 충격을 받고 재수를 한다. 이 과정에서 그의 재능을 아껴 주고 인정해주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불과 1년 만에 명문 공대인 그르노블 국립전산·응용수학대학에 합격한다.
졸업 후에는 툴루즈의 IT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한다. 하지만 위계질서를 못 참는 그는 사사건건 상사와 충돌했고 10년을 간신히 채운 뒤 나와 2000년 애니웨어 테크놀로지(Anyware Technology)라는 회사를 창업한다. 직원들 월급이 밀리고 파산 위기에 처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한 끝에 2008년 회사를 스위스의 웨이브콤에 1300만 유로(170억 원)에 매각한다.
다음으로 모바일 웹 서비스를 중심으로 하는 구젯(Goojet)이라는 회사를 창업하지만, 때마침 불기 시작한 애플의 아이폰 열풍에 밀려 실패한다. 르모앙은 이때의 경험을 “꿈이 너무 작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고, 성공했더라도 별 볼 일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러던 중에 푸르테를 만나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그는 즉시 지구상의 모든 사물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최초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세상을 뒤집는 혁신이 반드시 최첨단 기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고 그것을 풀 기술과 방법이 이미 있다면,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혁신이 아니겠는가. 시그폭스는 2015~2016년에 걸쳐 시리즈 D, E 펀딩을 통해 각각 1억 유로(1300억 원)와 1억 5000만 유로(1900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연이어 유치했다. 여기에는 한국의 SK텔레콤과 삼성전자도 투자자로 참여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통신망은 대부분 국가별 기간통신망 사업자들에 의해 제공된다. 주로 이들이 IoT를 위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건설하겠다고 나선다. 반면 시그폭스가 추진하는 네트워크는 국경을 뛰어넘어 전 세계를 커버하는 통합 네트워크이다. 구닥다리 전파 기술자와 빈민가 악동 출신의 창업가가 의기투합해 만든 이 10년 차 스타트업은 과연 공룡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시그폭스의 갈 길은 아직 멀다.
필자 곽원철은 한국의 ICT 업계에서 12년간 일한 뒤 2009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현재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 담당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8년 한-프랑스 스타트업 서밋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기재부 주최로 열린 디지털이코노미포럼에서 유럽의 모빌리티 시장을 소개하는 등 한국-프랑스 스타트업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곽원철 슈나이더일렉트릭 글로벌전략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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