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드라마에 소개되는 주인공들의 직업은 때로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기도 한다. 드라마가 인기이고 그 직업을 맡은 주인공이 매력적일수록, 드라마를 보는 청춘들은 ‘나도 한번’ 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파일럿’을 보면서 조종사를 꿈꾸거나 ‘짝’을 보면서 항공 승무원에 환상을 갖고 ‘종합병원’을 보면서 의사가 되고 싶었던 경험이 30~40대에게 있었던 것처럼, 지금의 10~20대도 어떤 전문직 드라마를 보고 앞날을 결정짓고 있을지 모른다.
특정 직업을 소재로 한 드라마 중 2001년 방영한 ‘호텔리어’를 빼놓을 수 없다. 김승우, 배용준, 송윤아, 송혜교 등이 출연한 ‘호텔리어’는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호텔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일과 사랑을 다루며 호텔리어라는 직업에 많은 관심을 쏠리게 했다. 깔끔하게 차려 입고 능수능란하게 고객들을 상대하는 모습이 일견 화려해 보였으리라.
‘호텔리어’는 사장이 급작스레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고 경영난에 봉착한 30년 전통의 특급호텔 서울호텔을 배경으로 한다. 사장의 부인 윤동숙(윤여정)은 과거 서울호텔 총지배인으로 근무했던 한태준(김승우)을 불러들이려 신뢰하는 당직 지배인이자 태준의 연인이었던 서진영(송윤아)을 라스베이거스로 급파한다. 서울호텔을 호시탐탐 노리는 사업가 김복만(한진희)은 미국에서 활동하는 M&A(인수·합병) 전문가 신동혁(배용준)을 거액을 들여 고용한다. 진영은 우여곡절 끝에 태준을 서울로 오게 하는데 성공하고, 그 와중 우연히 동혁과 만나며 호감을 가진다.
호텔을 살리고자 돌아온 태준과 호텔을 인수하고자 찾아온 동혁, 그리고 태준의 옛사랑이면서 동혁의 시선을 사로잡은 진영. 우리는 태준-진영-동혁이라는 삼각관계가 펼쳐지리란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태준을 좋아하게 되는 김복만 사장의 외동딸 김윤희(송혜교)가 가세하면서 삼각관계는 사각관계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호텔리어’는 전문직 드라마라는 외피를 두르고 직장에서 연애하는 그저 그런 트렌디 드라마일까?
분명 ‘호텔리어’는 20회 내내 동혁-진영-태준-윤희라는 물고 물리는 사각관계로 고구마 먹은 듯 답답한 감정 사이사이 아스라한 떨림을 안기는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다. 다이아몬드 빌라를 안내하다가 동혁과 진영이 춤추는 장면, 동혁이 서울호텔을 인수·합병하러 온 적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진영을 붙잡고 “귀 막고 눈 감고 나만 봐”라는 대사를 날리는 동혁과 진영의 통로 키스신을 보라.
약 20년 전 드라마임을 감안하더라도 항마력(손발이 오그라드는 걸 보고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나타내는 수치) 쩌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잘라버리고 싶지만 그럼에도 주책 맞게 심장도 쿵쾅거리게 만드는.
그렇다고 ‘호텔리어’가 호텔 사람들의 ‘일’을 보여주는 데 인색한 건 아니다. 드라마 특유의 과한 설정이 많긴 하지만 총지배인 태준부터 태준과 대척점에 서 있는 부지배인 오형만(허준호), 당직 지배인 진영, 객실 관리장 이순정(최화정), 노 주방장(명계남), 웨이터와 룸메이드, 벨맨에 이르기까지 서울호텔 1200여 명의 입장과 취하는 행동은 다를지언정 호텔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프라이드만큼은 남다르다는 걸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충분히 보여준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호텔 안에서 수많은 고객들이 체크인하고 체크아웃하기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그들은 수없이 냅킨을 접고, 접시를 나르고, 때론 진상 고객의 터무니없는 부탁으로 곤욕을 치르거나 무릎을 꿇는다. 예쁘게 머리 묶고 방긋방긋 웃는 송윤아와 송혜교의 얼굴만 쳐다본 게 아니라면, 진짜 호텔리어의 삶이 때론 개인의 자존심을 철저히 내려놔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30대 초중반 나이에 특급호텔 총지배인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설정, 파트를 넘나들며 간섭하는 당직 지배인의 넘치는 오지랖, 경영난에 시달리는 호텔을 인수하려는 이들에 대한 과도한 적개심과 서울호텔에 대한 과한 로열티 등은 살포시 넘어가자.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트렌디 드라마에서 어느 정도 리얼리티가 배제되는 건 흔한 현상이었으니까.
그렇다고 40~50대 총지배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룰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입양아 출신인 동혁이 호텔에서 사랑뿐 아니라 친동생 제니(김나래)를 찾게 되고, 갑자기 남편을 심장마비로 잃은 서울호텔 사장 윤동숙이 또 갑자기 폐암에 걸려 세상을 뜨는 등 호텔이라는 장소에서 혈육의 정과 생의 이별까지 다루는 오버도 넘어가주자. 어쨌든 호텔이란 공간이 각양각색 사람이 모이는 만큼 각양각색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건 맞으니까.
재미난 건 극중 서울호텔의 배경이 되었던 그랜드 워커힐 서울(옛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서울)이 톡톡한 홍보효과를 거둠과 동시에 이후 명예 총지배인으로 임명했던 김승우, 배용준의 결혼식 장소로 선택되었다는 점. ‘호텔리어’로 큰 사랑을 받았던 두 배우가 실제 호텔에서 사랑의 결실을 거뒀다는 게 여러모로 인연인 듯싶다.
그나저나 요즘은 ‘호캉스’가 대세인 데 반해 호텔리어의 인기는 옛말이란다. 정신적 부담이 큰 서비스업인 데다 업무 강도도 세고 처우도 다른 직업군에 비해 낮다는 인식으로 특급호텔도 젊은 구직자를 구하기 어려운 인력난에 시달린다고. 2001년 당시 ‘호텔리어’를 보고 호텔리어가 된 사람들이 지금 어떤 심정일지, 2019년에 다시 ‘호텔리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할 따름이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작가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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