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미국은 건국 초에 연방정부의 역할을 강조한 정파와 각 주의 자치를 강조한 정파 간에 치열한 사상투쟁을 벌였다. 이들 양 정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은 두 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격돌해 1796년에는 애덤스가, 1800년에는 제퍼슨이 승리했다. 선거에서 패배한 애덤스 측은 제퍼슨이 취임하기 직전에 50명이 넘는 판사를 무더기로 임명했다. 사법부에 연방세력들을 심어두려는 일종의 ‘정치적 알박기’였다.
문제는 급하게 판사들을 임명하다보니 몇 명에게는 임명장이 전달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 중 한 명인 마버리는 새로운 정부의 국무장관인 매디슨에게 임명장을 교부해달라고 했지만 매디슨은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마버리는 임명장의 교부를 청구하는 직무집행소송을 연방대법원에 제기했다. 1798년 의회가 제정한 법원조직법 제13조는 판사 임명장 교부는 연방대법원에 1심 관할이 있다고 했다.
당시 연방대법원장은 애덤스가 퇴임 직전에 임명한 존 마셜이었기에 마버리에게 유리한 결론이 나올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1803년 2월 24일 대법관들의 전원 일치로 나온 판결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마셜 대법원장은 마버리는 임명장을 보유할 권리를 가지지만, 연방헌법에 따르면 연방대법원은 원칙적으로 상소심만 관할하므로 1심 관할을 인정한 법원조직법 제13조는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즉 연방대법원은 마버리가 매디슨에게 청구하는 소송을 심사할 수 없으므로 결국 마버리는 임명장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핵심은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위헌심사권한을 인정한 것이다. 제퍼슨 대통령은 “군대조차 감히 시도할 엄두를 못 내는 일”을 한 것이라며 유감을 표했지만, 연방대법원이 권력분립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 유명한 마버리 대 매디슨(Marbury v. Madison) 판결이다.
‘내 편 아니면 네 편’인 시절이다. 단지 이념 갈등으로만은 이해될 수 없다. 똑같은 사안임에도 그때마다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김경수 지사 1심 유죄 판결에 이은 법정구속과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 영장기각에 대한 정치권 입장을 접하면 이해가 한결 쉽다.
김경수 지사에 대한 1심 법원의 유죄판결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재판을 담당했던 부장판사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 비서실에서 근무한 경력을 지적하면서 “사법농단 적폐세력의 조직적 반격”이라고 반발했다. 그러자 자유한국당은 재판 불복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김은경 전 장관에 대한 구속영장기각을 두고는 공수가 바뀌었다. 이번에는 한국당이 영장전담판사가 임종석 전 비서실장과 같은 대학 출신이며 대법원이 수사가 진행 중에 ‘알박기’로 임명한 것이라며 반발했다. 청와대는 즉각 영장기각결정을 존중한다며 환영했다. 판사의 신상털기에 나서는 것은 양쪽 다 마찬가지다. 우리 편에 불리한 판결을 선고하는 판사는 적폐로 몰리는 형국이다.
사법부가 과거 독재정권 시절 정권의 시녀라는 비난을 들은 적은 있지만 민주화 이후에 요즘처럼 ‘돌팔매질’을 맞은 기억은 없다. 내년 총선을 앞둔 정치권이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잉 대응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사법농단의혹을 초래한 양승태 코트(Court)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대법관이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다른 공직을 맡거나, 현직 판사가 사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청와대 비서관에 임명되는 등 정치권으로부터 독립을 스스로 훼손하더니 급기야는 특정 사건을 두고 대법원이 청와대와 재판 진행방향을 논의한 의혹이 제기됐다. 권력분립과 사법권독립이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건국 초 사법부 위상은 훨씬 열악했다. 심지어 연방대법원은 독립 건물도 없어 국회 의사당 회의실을 빌려 업무를 봤고, 정파 간 갈등도 지금의 우리 현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그러나 존 마셜 대법원장의 지혜와 용기 덕분에 - 제퍼슨에 의하면 “가장 무해하고 힘없는 존재”였던 - 연방대법원의 위상은 권력분립의 한 축으로 단단히 자리 잡게 되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한 지 햇수로 2년이 됐다. 개별 법정에서 판사들이 재판에 정진하는 것이 장시간에 걸친 신뢰회복의 길이라면, 대법원은 당장이라도 국민들의 시선을 되돌리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다. 마셜 대법원장은 판사의 권위를 상징했던 가발을 폐지하고 대중에게 다가섰다.
양승태 코트에서 제왕적 권한으로 지적된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을 포기하거나, 대법관들의 변호사개업을 금지하거나, 심리불속행을 폐지하는 선언을 기대한다면 지나치게 과한 것일까. 정치권의 판결불복에 국민들이 정치권을 비판하는 그날이 올 수 있도록 대법원장의 지혜와 용기를 고대한다.
김한규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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