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2016년 우연한 기회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천문학 교양서를 처음으로 쓰게 되었다. 연구실 바깥 일반 시민들에게 연구자들의 생생한 천문학 이야기를 전달하게 된 만큼 나는 의욕이 엄청났다. 반면 의욕에 비해 아직 글 쓰는 솜씨는 한참 부족했다. (물론 지금도 많이 부족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연구자들의 어려운 전문용어를 비전공 일반 시민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전달할 수 있을까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우주 팽창과 함께 서서히 멀어져가는 은하들의 거리를, 점점 서먹해지는 권태기 연인들에 비유하고, 작은 크기 때문에 행성의 지위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명왕성의 신세를, 키가 작아 상대에게 매력을 발산하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사람의 안타까움에 비유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유비(類比)가 많이 담겼다며 뿌듯한 마음으로 초고를 에디터에게 보냈다. 몇 주 후 초고를 검토한 에디터에게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코멘트를 받게 되었다.
50억 년 전에 홀로 탄생해 곁에 다른 별 하나 없이 외롭게 50억 년째 타오르는 태양의 안타까운 현실을 소개하면서 나는 “50억 년째 모태 솔로”, “50억 년째 외롭게 늙어가고 있는 우주급 독거노인 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에디터는 ‘독거노인’이라는 표현을 태양의 외로움을 비유하는 유머 수단으로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나의 얕은 감수성에 크게 반성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처한 힘든 현실일 수 있는 단어를, 독자들과 낄길거리며 웃어넘기는 하나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려 했던 나 자신이 정말 한심하게 느껴졌다. 원고를 탈고하는 과정에서 에디터는 ‘독거노인’을 비롯해 내가 사용한 잠재적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 차별·혐오 발언) 요소들을 짚어주었다. 덕분에 초보 저자의 원고는 조금 더 올바른 방식으로 우주를 소개하고 비유하는 글로 완성될 수 있었다.
천문학에서는 복잡한 현상을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사람의 모습이나 행동에 익살스럽게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토성 곁을 돌면서 토성 고리 안팎에서 중력 힘겨루기를 하면서 양치기가 양을 몰듯이 고리 입자들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게 해주는 토성의 위성들을 ‘양치기 위성(Shepherd Satellite)’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폭발하지 않지만 별이 폭발할 때와 비슷하게 밝기가 순간 밝아지는 현상을 ‘사기꾼 초신성(Supernova Impostor)’이라고도 부른다.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먼 우주에서 벌어지는, 그래서 우리가 체감하기 어려운 우주 현상을 사람들의 모습에 비유해 설명하면 그 현상을 쉽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가끔 이런 비유적 표현 가운데에는 미처 깊게 고민하지 않고 만든 것이 더러 있다.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 있는 시대착오적 표현들이다. 그 가운데에는 이미 관용적 표현으로 굳어져 쉽게 바꾸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나는 은하들 간의 상호작용(Galactic Interaction)을 연구한다. 태양과 같은 별들이 수천억 개 혹은 그 이상 모여 있는 거대한 은하들은 우주 공간에 가만히 박혀 있지 않다. 강한 중력으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은하들은 서서히 다가가게 된다. 중력에 의해 가까워진 두 은하는 결국 하나의 더 거대한 은하로 병합하고 충돌하는 과정을 겪는다.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는지에 따라 그 만남의 모습이 다르듯이, 은하들 간의 상호작용도 각 은하의 성질과 상호작용 방식에 따라 아주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별을 만들 수 있는 재료인 신선한 가스를 한껏 머금은 은하들이 강하게 충돌하면 그 충돌 경계를 따라 가스가 순식간에 압축되면서 새로운 별들이 폭발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말 그대로 충돌을 겪은 은하들은 일순간 베이비 ‘스타’ 부머(Baby Star Boomer) 시대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격하게 충돌하면서 다른 은하의 가스를 순식간에 날려버리면 은하가 별을 새롭게 만들 능력을 떨어뜨리는 반대의 효과도 나타난다. 다른 은하에 의해 별 형성을 못하게 되는 이 현상을 천문학자들은 ‘갤럭틱 허래스먼트(Galactic Harassment)’, 즉 ‘은하 간 추행/괴롭힘’이라고 부른다. 위력으로 ‘갑질’을 하는 파워 허래스먼트(Power Harassment) 또는 성추행(Sexual Harassment)에서 쓰는 바로 그 단어다.[1][2]
실제로 학회장에서 관련 주제를 발표하는 천문학자 가운데에는 ‘은하가 은하를 추행하는 것’이라는 부연 설명까지 달아 좌중의 웃음을 유도하는 ‘유머 센스’까지 발휘하는 사람도 있다.
오래전 천문학자들은 어떤 강력한 은하에 의해 왜소하고 힘없는 은하가 가스를 빼앗기고 활동성이 떨어지게 되는 현상을 ‘쉽고 재미있게’ 비유하기 위해 이 단어를 선택했다. 이 용어는 은하 간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논문이나 학술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일상적 과학 용어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최근 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에 불편해할 수 있는 용기, 예민해질 수 있는 감수성’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면서 이런 용어를 고민하는 천문학자들이 늘고 있다.
2018년 1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국 천문학회에 참석했다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젊은 여성 천문학자와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은하 간 상호작용의 결과 만들어질 수 있는 몇 가지 세부적인 은하의 구조 변화에 대한 내 발표 내용에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육중한 은하가 왜소한 은하의 가스를 뺏어버리는 현상’을 설명하면서 ‘갤럭틱 허…’라고 말하다가 멈칫하더니 ‘갤럭틱 인터랙션’이라고 단어를 바꿔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학계에서 관용적으로 쓰이는 ‘갤럭틱 허래스먼트’라는 표현을 아직 완전히 입에서 떼지 못했다며 이 단어를 다른 말로 대체하거나 사용을 줄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마 이 용어가 천문학계에서 사용되기 시작하던 당시에 여성 천문학자가 더 많았다면 이렇게 쉽게 학술적 비유로 자리 잡지 않았을 것”이란 아쉬움도 전했다. 나 역시 그 고민에 상당 부분 동의했다.
만약 유럽 천문학자들이 표면의 색깔이 아주 어두운 갈색 빛의 행성을 ‘마이클 조던 플래닛’이라고 부르거나 표면이 독특한 노란 빛을 띠는 행성을 ‘브루스 리 플래닛’이라고 부른다면, 단순히 행성의 물리적 특징을 ‘재미있게’ 비유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이제는 누구도 이런 인종차별적 비유를 학술적 유머에 활용하지 않는다.)
작은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불편해하는 것을, 누군가는 쓸데없이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태양의 쓸쓸함에 ‘독거노인’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되었던 것처럼, 다양한 비유적 표현이 누구에게는 웃어넘길 수 없는 불편한 말일 수 있다는 고민은 분명 필요하다.[3]
누군가 불편해한다면, 그것은 좋은 농담이 될 수 없다. 누군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불쾌하다고 말한다면, 그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불편한 이야기를 꺼낸 발화자의 얕은 감수성이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
이미 자리 잡은 표현과 용어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안길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면 사용을 줄이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 무방비 상태에서 불편한 폭력과 상황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차별적·혐오적 표현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학회장에서도, 친구들과의 카톡방에서도 사라져야 한다.
[1] https://en.wikipedia.org/wiki/Interacting_galaxy#Galaxy_harassment
[2] https://www.nature.com/articles/379613a0
[3] http://www.auswhn.org.au/awhn/sexual-gender-based-abuse-discrimination-academia-australia-survey/
필자 지웅배는? 고양이와 우주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 ‘은하철도 999’를 보고 우주의 아름다움을 알리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은하진화연구센터 및 근우주론연구실에서 은하들의 상호작용을 통한 진화를 연구하며, 강연과 집필 등 다양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하고 있다. ‘썸 타는 천문대’, ‘하루 종일 우주 생각’, ‘별, 빛의 과학’ 등의 책을 썼다.
지웅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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