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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스타트업열전] 프랑스 인슈어테크 선두주자 '알란'

CEO 사무엘리앙, 항공스타트업 창업 전력…대기업 틈새 소규모 사업자·스타트업 겨냥

2019.03.19(Tue) 09:25:46

[비즈한국] 오늘 소개할 프랑스의 스타트업은 지난 달에 시리즈 B 라운드를 통해 4000만 유로(510억 원)의 투자를 유치, 총 7500만 유로(980억 원)의 누적 투자액을 달성한 디지털 건강 보험사인 ‘알란(Alan)’이다. 

 

보험 관련 스타트업들은 보험을 뜻하는 영어 단어 인슈어런스(insurance)의 앞글자를 따서 ‘인슈어테크(insurtech)’라고 부른다. 많은 인슈어테크 스타트업이 기존 보험 상품을 연결해주는 정도에 그치는 데 반해, 알란의 비즈니스 모델은 보험업 그 자체이다. 2016년 1월 창업해 바로 그해에 프랑스 중앙은행 산하 금융보험감독원으로부터 정식 보험업 인가를 받았다. 1986년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신규 등록된 독립 보험회사라고 한다. 그만큼 진입 장벽이 높은 영역이라는 의미다.

 

알란의 창업자는 1988년생 동갑내기이자 프랑스 국립교량학교 동창인 장샤를 사무엘리앙(Jean-Charles Samuelian)과 샤를 고린틴(Charles Gorintin)이다. CEO 사무엘리앙은 23세이던 2011년에 이미 항공산업 스타트업 익스플리싯(ExpliSeat)을 창업한 바 있다. 

 

디지털 보험회사 알란을 창업한 장샤를 사무엘리앙(왼쪽)과 샤를 고란틴. 사무엘리앙은 이미 23세에 익스플리싯이라는 항공 스타트업을 창업한 바 있다. 사진=알란

 

시장이 엄청나게 크고 복잡하다는 것 외에 보험 산업과 항공 산업의 공통점은 뭘까? 첫째, 인간의 생명·건강과 직결되어 국가가 촘촘하게 규제하는 인허가 산업이라는 점, 둘째, 거대 공룡 기업들이 이미 장악하고 있는 분야라는 점이다. 

 

척 보기에도 ‘덕후(geek)’스러워 보이는 이 천재 프로그래머는 도대체 어떤 연유로 해서 스타트업이 감히 넘보기 힘들 듯한 영역만 골라가며 성공적으로 창업을 한 것일까?

 

의사 부모 밑에서 태어난 사무엘리앙은 어려서부터 수학과 프로그래밍에 관심이 많았다. 12살 때부터 지역 비디오 체인점의 웹사이트와 회계 처리 시스템을 코딩하는 알바를 하고, 15살에는 삼촌이 경영하는 병원의 의료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한다. 그가 두 번의 창업을 함께 한 동지들을 만난 ‘프랑스 국립교량학교’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프랑스의 고등교육 기관인 그랑제콜에서도 최상위 명문인 이 학교는, 교량과 제방을 건설하는 토목 기술이 국가의 경제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던 16세기에 설립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토목뿐 아니라 전산학, 응용 수학, 교통 공학, 도시 공학 등 다양한 공학 분야는 물론 경영·재무와 경제학도 가르치고 있다.

 

2011년 졸업을 앞두고 있던 사무엘리앙에게 교량학교 동창이자 어릴적부터 친구인 벤야민 사다(Benjamin Saada)가 재미있는 제안을 했다. 사다는 당시 졸업 과제로 런던에 있는 회사에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런던-파리 간 비행기를 자주 이용했다(런던-파리 간에는 해저 터널을 달리는 고속철도가 있지만 학생들이 이용하기에는 요금이 너무 비싸다). 그런데 현대 공학 기술의 결정체인 기체와 엔진에 비해 기내 좌석은 허술하기 짝이 없어 놀랐다고 한다. 이에 두 사람은 또 다른 교량학교 동창인 뱅상 테제도(Vincent Tejedor)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익스플리싯(ExpliSeat)을 창업한다. 

 

익스플리싯은 티타늄 재질과 인간 공학적인 디자인을 활용하여 기존 이코노미석 좌석에 비해 무게는 절반으로 줄이고 2인치 정도 공간을 더 확보한 좌석을 개발한다. 이 좌석을 채택할 경우 항공기 한 대당 연간 평균 5억 원 이상을 절약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의 기술과 디자인은 10여 개의 국제 특허를 얻고 2014년에 유럽항공안전기구(EASA)와 미연방항공국(FAA) 인증을 모두 통과한다.

 

익스플리싯이 개발한 티타늄 재질의 항공기 좌석. 유럽항공안전기구와 미연방항공국 인증을 모두 통과했다. 사진=익스플리싯

 

이 기술은 기존의 거대 항공장비 업체들도 쉽게 개발하지 못한 것이다. 세계 최대 항공기 제조사인 에어버스가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개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또 항공기 좌석과 내부 설비 부문 최대 업체로 연간 매출이 7조 원에 달하는 조디악이 2014년에 유사한 경량 좌석을 선보였으나 아직까지 인증을 통과하지 못했다(조디악은 2017년 프랑스 항공기 엔진 제조업체 사프란에 11조 원에 인수됐다). 

 

익스플리싯은 오로지 디자인과 기술 개발에만 집중한다. 제품은 에어버스 본사가 있는 유럽 항공 산업 중심지 툴루즈의 업체들을 통해 위탁 생산한다. 대규모 자본이 필요하지 않은 순수 디자인·기술 업체로서 펀딩 내역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 기업 가치는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 사무엘리앙은 할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한 일을 계기로 기존의 불편한 건강보험 가입 및 이용 체계를 바꾸겠다는 결심을 한다. 익스필리싯의 지분을 판 그는 미국에서 일하던 동창 샤를 고린틴을 불러들인다. 고린틴은 교량학교 졸업 후 UC 버클리에서 금융공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에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보험업이 발달한 프랑스에서는 노후 보장 등 많은 것을 보험으로 해결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전 국민이 가입된 기본 건강보험이 있고 보장 범위도 좋은 편이다. 그 외에 (필자를 포함한) 직장인들은 추가로 사보험을 들어두는 사례가 많다. 대기업에 다니는 경우 회사에서 직원 복지 차원에서 보험료를 보조해주는데, 2016년 1월부터 1인 이상 고용 사업자들은 직원이 추가로 가입한 건강보험료의 50% 이상을 지원하도록 의무화되었다. 

 

알란은 AXA, 알리안츠 등 거대 보험사들이 대기업 위주 사업을 펼치는 틈새를 파고들어 소규모 사업자와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건강보험을 제공한다. 전략은 세 가지. 첫째 온라인으로 5분 이내 가입할 만큼 간단할 것, 둘째 가입자가 모바일 앱을 통해 가입한 보험 관련 사항을 쉽고 빠르게 알 수 있게 투명할 것, 셋째 영업장과 설계사 없이 모바일과 온라인으로만 운영하는 100% 디지털 보험회사를 설립하는 것이다.

 

두 천재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의 대담한 포부는 마침 핀테크·인슈어테크 스타트업 전문 투자 펀드를 운영하고 있던 프랑스의 준공영 기업인 CNP 보험의 눈에 들게 된다. 이미 1억 유로의 투자 자금을 확보하여 향후 5년간 관련 스타트업에 투자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CNP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P2P 핀테크 스타트업인 렌딕스와 H4D에 이어 세 번째 투자처로 알란을 선택한다. 

 

지하철역 알란 광고판 앞에서 함께한 알란 직원들. 알란은 2018년 4월에 2300만 유로 펀딩을 받은 지 불과 10개월 뒤에 4000만 유로를 더 투자받았다. 사진=알란

 

CNP는 다른 투자자들을 엮어 초기 시드 투자로는 이례적으로 큰 금액인 1200만 유로(150억 원) 펀딩을 주도하고 알란의 재보험사로서 위험을 분산하는 역할까지 자임한다. 신생 업체인 알란이 설립 첫해에 보험업 인가를 취득할 수 있었던 것은 CNP의 투자와 지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빠른 성장을 거듭하던 알란은 2018년 4월에 인덱스 벤처스가 주도한 시리즈 A를 통해 2300만 유로(300억 원)의 자금을 모았고, 불과 10개월 뒤인 올해 2월에 시리즈 B를 통해 4000만 유로(510억 원)를 추가로 펀딩했다. 시리즈 A 직전에 이미 850개 기업에서 일하는 7000명의 보험 가입자를 통해 70억 원가량의 연간 매출을 올렸는데,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2000개 기업, 2만 7000명의 가입자와 300억 원에 가까운 매출로 성장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유효한 대규모 투자를 받은 것이다. 

 

추가 자금을 통해 현재 60여 명인 직원 수를 170여 명으로 늘리고, 다양한 신제품과 서비스를 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 직원 20명 이하의 소규모 기업 대상이던 사업 영역을 20명 이상 기업과 1인 기업(프리랜서)으로 확장할 계획을 갖고 있다.

 

알란의 성공 사례는 규제가 심하고 대기업이 장악해서 진입 장벽이 높아 보이는 영역도 스타트업의 기술력으로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영역일수록 오히려 시장이 왜곡되어 있거나 소비자의 니즈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은 틈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감한 투자를 통해 자금뿐 아니라 시스템으로도 스타트업을 육성한 공기업의 역할 또한 중요했음은 물론이다.

 

필자 곽원철은 한국의 ICT 업계에서 12년간 일한 뒤 2009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현재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 담당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8년 한-프랑스 스타트업 서밋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기재부 주최로 열린 디지털이코노미포럼에서 유럽의 모빌리티 시장을 소개하는 등 한국-프랑스 스타트업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 

곽원철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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