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학원물을 좋아한다. 그렇게 유치한 걸 왜 보느냐는 비웃음도 가끔 받지만, 유치한 게 왜? 우리는 모두 한때 손발이 오그라드는 유치한 시절을 보냈고, 북한도 무서워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중2병을 겪었고, 다 아는 척 이유 없는 방황과 반항기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내 안의 흑염룡이 폭주하던 질풍노도의 시기, 그 온갖 유치하고 어리바리하고 답답하고 그러면서도 풋풋하고 치열했던 감정을, 한발짝 떨어져 시청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물론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건 극구 사양이다).
학원물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학교’. 1999년 방영한 ‘학교’는 이후 ‘학교2’ ‘학교3’ ‘학교4’를 거쳐 ‘학교 2013’ ‘후아유-학교 2015’ ‘학교 2017’에 이르기까지 20년 가까운 세월을 ‘학교’라는 브랜드로 지속했던 시리즈의 시작이었다. 이전에도 ‘사춘기’ ‘신세대 보고서 어른들은 몰라요’ ‘청소년드라마 나’ 등을 재미나게 시청했지만, ‘학교’는 그와는 또 달랐다. 16부작, 확연한 미니시리즈라서 그랬을까, 드라마의 ‘쪼임’이 확실했다.
다음 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충격적인 엔딩, 극적 요소를 강조하는 인물 테마송(장혁이 맡은 우혁 테마송!), 밝음과 어둠을 오가는 텐션 등 몰입을 높이는 요소가 충만했다. 시청률은 기억나지 않지만 반응은 확실했다. 장혁, 최강희, 안재모, 박시은, 양동근, 김민선, 배두나, 최영완, 이재은 등 학생 역할의 배우들은 이후 확실히 주목받는 연기자로 거듭났으니까.
교사 역할의 이창훈, 염정아, 신구, 강석우, 명계남, 이혜숙, 이한위도 단단하게 젊은 배우들을 뒷받침해줬다(‘쓰앵님’을 부르짖던 염정아가 학생들의 개성과 인권을 부르짖는 교사로 나온다!). 이후 등장한 시리즈 후속작들에서 자주 보이는 스테레오 캐릭터들을 정립한 것도 ‘학교’다.
‘학교’는 동광고등학교 2학년 3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털털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이민재(최강희), 성실하고 착한 모범생 김건(안재모), 항상 전교 1등으로 똑 부러지는 채정아(박시은), 분위기메이커이자 개그 담당인 조석호(양동근), 공부엔 관심 없고 항상 거울만 보는 귀여운 푼수 박나리(김민선) 등의 무리를 중심으로 과묵한 아웃사이더 강우혁(장혁), 집안 좋고 공부 잘하는 반장이지만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권혁수(김정욱), 춤추며 놀러 다니는 날라리 배두나(배두나) 등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얽힌다.
여기에 사명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임 교사 이재하(이창훈)와 열혈 교사 차현주(염정아), 조용한 듯 결국 사랑으로 학생들을 이끄는 원로 교사 신문수(신구) 등 교사 군단이 가세하며 학교라는 공간의 이모저모를 비춘다. 사실 ‘학교’는 지금 시선으로 봐도 충격적인 장면들이 여럿이다. 교사에게 맞고 홧김에 경찰에 신고하는 학생의 에피소드가 나오는 1화부터 미성년자들이 술 담배 하며 노는 장면은 예사요, 일진들의 폭력과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낙태하는 에피소드까지 과감 없이 보여준다!
물론 어떤 에피소드이건 훈훈한 마무리로 끝나는 것이 학원물의 미덕인지라 막장 드라마처럼 보면서 암이 생길 것 같은 답답함은 없다(다소 손발은 오그라들지만).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낙태하고 끝내 가출한 영완(최영완)이 지치지 않고 자신을 기다려준 친구 두나와 이재하 선생님 덕에 학교로 돌아오고, 오만하고 독선적이어서 모두를 발밑으로 내려다보던 혁수도 신문수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각성하여 밝은 힙합 댄서로 거듭나는 식이다.
외국어고에서 전학 와 공부에 미쳐 있던 승희(이재은)가 라이벌이던 정아의 말로 닫힌 마음을 풀고,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과 가정형편으로 급 비뚤어지던 건이도 신문수 선생님의 넓은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라는 점에서 무수히 욕을 먹는 한국 드라마 특성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학원물이니까 괜찮다. 우리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불운한 결말을 맞는 것을 보고 싶은 냉혹한 어른들이 아니니까. 냉혹한 세상은 어른이 되어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으니까.
20년 전 이야기인 만큼 지금 ‘학교’를 보면 동화 같은 구석이 많다. 교사는 생활기록부 기록하는 존재이고 학교는 대학 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여긴다는 2019년의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체벌하던 선생님이 학생에게 신고를 당한 후 충격으로 학교를 떠나려 하자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만류하는 1999년의 학생들을 이해할지 의문이다. 그 시절 학교를 다녔던 지금의 ‘젊꼰’들은 체벌을 어느 정도 필요악으로 여겼지만 지금 시대는 다르니까. ‘SKY’에 가기 위해 친구들을 경쟁자로 여긴다는 지금, 학교 비리에 반대하고 영화동아리 활동에 열심이면서 제 시간을 쪼개 서로의 공부를 봐주는 이야기도 현실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는 10대 청소년들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공부를 하면서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저 친구가 좋으면서도 왜 나와는 이다지도 다른지 질투하고, 학교가 갑갑한 감옥 같으면서도 함께 있는 친구 때문에 즐겁게 버티는 마음은 여전할 것이다.
범생이든 날라리든, ‘인싸’든 ‘아싸’든, 덕후든 문제아든 간에 한 반에 배정된 아이들은 저마다 다르고, 그 작은 사회 안에서 어우러지며 치열하게 성장해간다. 때로는 폭주하는 흑염룡을 제어하지 못해 서로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세상의 편견으로 상처 입기도 하지만 쓰러진 아이들을 일으키고 나아가게 하는 공간이 학교일 것임을 지금도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 2019도 나오면 좋으련만.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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