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유럽과 미국의 역사, 특히 근대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한 가지 특징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미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산업국가로 오랫동안 군림했기에,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노동계층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형성 및 전국적인 조직 결성 등이 결국은 자신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 의문을 풀지 못했는데, 최근 읽은 ‘도시로 보는 미국사’ 덕분에 상당 부분 해소가 되었다. 이 책의 저자 박진빈 교수는 1900년 초반 미국 최대의 혁신 도시로 등장하던 시카고의 ‘인종갈등’에 주목한다.
풍요로운 일자리 이외에도 두 가지 이유에서 시카고는 흑인 대이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교통로였다. 시카고는 중서부 철도의 종착지로서, 특히 미시시피에서 시카고까지의 직행 열차 편을 이용해 이주하는 수많은 흑인들이 새로운 고향으로 삼기에 편리한 곳이었다. (중략)
두 번째 이유는, 시카고에는 흑인을 겨냥해 만든 신문인 ‘시카고 지킴이’가 있었는데, 이 신문이 남부 흑인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신문은 남부 흑인을 상대로 조직적인 선전에 나서 이들의 시카고 이주를 부추겼다. -책 69쪽
1916~1920년 사이에 시카고에는 7만 5000명의 남부 출신 흑인이 도착했다고 한다. 이 결과 시카고의 흑인인구는 11만 명 이상으로 치솟았고, 이 숫자는 1920~1930년에 다시 두 배로 뛰어올랐다. 이주에 성공한 흑인들은 처음에 매우 행복했다.
1917년, 미시시피를 떠나 시카고에서 새 삶을 만나게 된 한 흑인은 고향에 남아 있는 친지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아, 세상에. 나는 첫달에 승진했어. 목수장의 제1 목수보가 되었지. 목수장이 없을 때는 내가 책임자이고 한 달에 95달러를 벌어. 내가 일을 잘한다는 것은 너도 잘 알 거야. (중략) 이 일을 20년 동안 해왔는데 처음으로 내가 인간처럼 느껴져. 뭔가 특권이 있다고 느끼는 건 정말 기쁜 일이군. -책 70~71쪽
그러나 시카고에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이민자들은 흑인들의 대규모 유입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흑인이 유입될 때마다 그 지역을 떠나는 식으로 대응했다.
불행하게도, 시카고에 도착한 흑인들은 자신들이 꿈에 부풀어 찾아온 곳이 흑백평등의 세상이 아님을 이내 깨달았다. 비록 남부처럼 공식적인 흑백분리법(짐 크로 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략) 시카고 역시 ‘분리된 사회’였던 것이다. (중략)
아니, 더 정확히는 백인의 세계에서 흑인을 소외시키고 있었다. 흑인의 분리는 주거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흑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흑인 밀집 지역이 생겨났다. 1920년경 시카고 흑인 인구의 78%가 사우스사이드 한 거리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는데, 백인들은 이를 ‘검은 벨트’라 불렀다. -책 71~72쪽
문제는 이와 같은 흑인들의 거주지역 분리가 근로 대중이 ‘정치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해했다는 점이다.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운동이 약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미국에도 분명히 노동운동이 존재했지만, 선거는 지역 단위로 치러진다. 즉 시카고의 사우스사이드 지역에서는 흑인이 당선되고, 그 이외의 지역에는 백인이 당선된다.
이 과정에서 사업주와 근로 대중의 관계보다 인종적인 이해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부각되었다. 특히 백인 위주의 노동운동에서 흑인은 협력 대상이라기보다 ‘파업 파괴자’로 간주되었다.
흑인 노동자들은 어떻게 시카고 노동운동에 흡수되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흑인들은 노동운동에 흡수되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동유럽과 북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패킹타운(도축공장)의 일자리를 흑인들이 급속도로 잠식하면서 이들 사이에 갈등이 싹텄다. (중략) 흑인들이 유럽계 이민 노동자들과 한데 어우러져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다. 유럽계 이민 노동자와 흑인 노동자 사이의 갈등의 원인은 흑인이 노조에 참여하지 않은 데 있었다. -책 76~77쪽
가장 빈곤한, 사회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흑인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했더라면 노동운동은 더욱 힘을 받았을 것이다. 왜 이게 이뤄지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남부에서 시카고로 이동한 ‘새로운 흑인’의 자아 정체성 발전과 이를 바탕으로 한 보다 평등한 사회로의 요구였다. 흑인은 백인 전용이라고 여겨졌던 직업군에서 구성비를 늘려 나가기 시작했고, 백인 거주지로 이주해 옴으로써 분리된 세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는 시카고 노조와 흑인 간의 갈등이었다. 비노조 노동력의 대부분(=파업 파괴자)을 구성했던 흑인에 대한 백인 노조의 시선이 곱지 못했다. -책 79쪽
그리고 이 갈등은 최악의 형태로 발산되고 말았다. 그것은 1919년 시카고 인종 폭동이었다. 마침내 사태가 종결되었을 때, 총 사망자는 흑인 23명에 백인 15명이었고 총 부상자는 537명이었다. 손실된 주택과 상가는 수백 채에 달했고 재산 피해액은 수십만 달러에 달했다.
특히 박진빈 교수는 인종 폭동 이후 만들어진 ‘인종관계위원회’의 최종 보고서(1922년)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고 지적한다.
권고 사항의 주된 내용은 “흑인 거주지(=사우스사이드)의 범죄 및 유흥 중심지 제거”, “흑인 주거지의 비위생적인 환경 처벌”, 그리고 “흑인지역 운동클럽에 대한 감시” 등이었다. 이는 인종 폭동의 원인 제공자와 주동자를 흑인으로 모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략)
인종 폭동의 피해자인 흑인을 도리어 책임자로 몰아붙이려는 시도는 다른 각도에서도 진행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가 사회적으로 팽배해 있던 시기였기에, 인종 폭동 전후로 흑인과 사회주의를 연결해 공격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중략) 국무장관 파머는 “볼셰비키가 흑인들에게 상당한 돈과 엄청난 문서 공세를 펴고 있으나, 시카고 인종 폭동에 영향을 주지는 않은 것 같다”는 발표를 할 정도였다. -책 86쪽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가 노동운동에서 유리되고, 더 나아가 볼셰비키로 몰아붙여지는 환경에서 사회민주주의 정치 세력이 성장할 수는 없다. 물론 노동조합이 흑인을 포용하고 또 이른바 ‘신흑인’들이 점진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내세웠다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의 성장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19년 시카고 인종 폭동, 그리고 뒤를 이은 필라델피아, 내슈빌, 찰스턴 등 미국 여러 대도시에서 인종 폭동이 빈발함에 따라 이 가능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도시로 보는 미국사’ 덕분에 어떤 사회의 현상을 파악할 때에는 그 ‘맥락’을 꼭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한국도 앞으로 이 문제를 비껴가지 못할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연 수십만 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유입되며, 이들이 무시할 수 없는 소수로 자리 잡을 때 1919년 미국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면밀한 연구는 물론, 장기적인 정책 대응이 필요한 시점으로 판단된다.
홍춘욱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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