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 얼핏 자주 쓰는 간단한 말로 들리지만 사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는 말에 박한 사람이 많다. 서비스에 대한 의례적인 감사로 ‘고맙습니다’는 종종 쓰지만, 진심을 다해 가까운 이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언제였던가. 만만해 보이면 당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는 현대인은 오히려 자주 고맙다, 미안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힐난하기도 한다. “너 호구야? 뭐가 그렇게 고맙고 미안해.”
2007년 방영한 드라마 ‘고맙습니다’는 드라마 제목치고 다소 평범하고 촌스러웠지만, ‘고맙습니다’란 말이 지닌 힘처럼 잔잔하고도 힘있게 시청자의 심금을 파고들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힐링 드라마’라는 칭찬도 많이 들었다. 아직도 유튜브에 업로드된 ‘고맙습니다’ 영상 클립에는 국내외 팬들을 막론하고 볼 때마다 눈물 나고 가슴이 따스해진다는 댓글이 많이 보인다. ‘고맙습니다’에 우리가 고마움을 느끼게 된 이유가 뭘까?
‘고맙습니다’는 각자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먼저 남자 주인공을 보자. 외과 레지던트 4년차지만 이미 출중한 실력으로 이름 나 있는 민기서(장혁)는 존경하던 아버지가 환자를 안락사시키는 일로 인해 의사 면허를 취소당하고 어머니와 이혼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하나뿐인 사랑이라 여기던 동료 의사이자 여자친구 지민(최강희)은 기서가 손쓸 수 없을 만치 진행된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의사지만 여자친구를 살리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상실감으로 그는 세상을 등지려 한다.
여자 주인공의 상황은 객관적으로 더 좋지 못하다. 이영신(공효진)은 작은 섬 푸른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 부모님은 어릴 적 세상을 떴고, 이제는 치매에 걸려 ‘미스타 리’로 부르는 할아버지 병국(신구)과 홀로 낳은 딸 이봄(서신애)을 건사하는 미혼모다.
할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나가는 등 사고를 치고, 티 없이 밝은 딸 봄이는 몇 년 전 있었던 사고 당시 수혈을 잘못 받아 HIV(후천성면역결핍증) 보균자인 상태. 심지어 영신의 친구이자 봄이의 생부인 최석현(신성록)이 약혼녀를 데리고 비즈니스차 푸른도에 돌아왔고, 봄이가 석현의 딸임을 짐작하고 있는 석현의 어머니 국자(강부자)는 영신과 봄 모녀를 눈에 가시처럼 여기며 하루라도 빨리 섬에서 내보내고 싶어 안달이다.
그 남자 민기서는 의사를 때려치우고자 어머니가 회장으로 있는 리조트 사업에 함께 일한다는 구실로 편의점도 없는 작은 섬에 내려왔다. 하필 그 섬은 여자친구 지민이 수혈을 확인하지 못한 실수로 HIV보균자가 된 소녀, 봄이 있는 푸른도. 기서가 일말의 죄책감으로 영신과 봄이 곁에 다가가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우연히 듣게 된 그 여자 영신의 자장가는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기서를 편안하게 잠자게 해줬으니까.
여느 드라마처럼 기서와 영신은 서로에게 차츰 따스하게 물들어간다. 다만 그 과정은 여느 드라마 같지 않다. ‘재벌 남자와 캔디녀의 사랑’에 흔히 보이는 ‘귀여운 여인 코스프레’나 ‘돈봉투 던지는 재벌가 사모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장면을 대치하는 건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두 사람의 진심, 그리고 봄이와 ‘미스타 리’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일궈내는 따스한 정(情, feat. 초코파이)이다.
존경하던 아버지를 잃고 사랑하던 여자를 잃고 피폐했던 기서는 작은 것에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영신네 가족과 함께하며 상처를 치유 받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지만 자신의 처지 때문에 자신을 돌이나 의자 같은 무생물로 여기며 살아가던 영신도 기서를 만나면서 자신들이 남과 다를 뿐이지 나쁘거나 이상하거나 잘못한 것이 아님을 확인 받는다.
그렇다. ‘고맙습니다’는 사랑과 정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다름’에 대해 이야기하며 편견을 딛게 만든다. 영신이 미혼모인 것도, 봄이 아빠가 없는 것도 남과 다를 뿐 잘못된 것이 아니다. 에이즈(정확히는 HIV보균자지만 통상 에이즈라 칭한다)에 걸린 봄이 괴물인 것도 아니다.
봄의 병을 알게 된 푸른도 주민들이 싸늘하게 영신네 가족을 배척했을 때 함께 분노한 우리(시청자) 또한 반성하게 된다. 일상생활로 전염되는 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간 이웃으로 살아온 영신네 가족을 매몰차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푸른도 주민들을 보며 ‘우리라고 정녕 달랐을까?’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 에이즈 환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많이 걷어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드라마의 덕이 컸다(물론 얼마 전 있었던 대학교 기숙사 에이즈 해프닝을 보면 크게 달라졌나 싶지만).
그리고 ‘미스타 리’ 병국과 손녀 봄의 ‘케미’. 항상 봄이에게 ‘메주’라고 부르며 놀리지만 또 누구에게나 “초코파이 줄까요?”라고 권하는 할아버지 병국과 자신을 천사라고 믿고 있는 천사 같은 봄이가 투닥투닥 어울리는 모습이 얼마나 천진하고 사랑스러웠던지.
특히 왜 손녀들에게 항상 세상에 고마워하게 가르쳤느냐며 “아름다운 세상? 개뼉다구 같은 소리 하고 있네”라고 일갈하는 기서에게 던지는 ‘미스타 리’의 말은 격언이 따로 없는 수준이다. “형(기서)이 개뼉다구니까 세상이 개뼉다구예요! 바보똥개야!”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던 무학대사의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지침이 되어버린 지금, ‘고맙습니다’의 인물들은 판타지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며 서로를 보듬지 않는다면 세상은 더욱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먼저 세상을 편견없이, 아름답게 바라봤으면 좋겠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해 말했으면 좋겠다.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어색하다면 초코파이를 곁들여서.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올드라마]
삼일절, 볼 때마다 아픈 '여명의 눈동자'
· [올드라마]
여전한 웰메이드 '그들이 사는 세상'처럼 살기를
· [올드라마]
좀비보단 뱀파이어 '안녕, 프란체스카'
· [올드라마]
명절에 보면 더욱 공포스럽고 기괴한 '솔약국집 아들들'
· [올드라마]
설날이면 그리워지는, '곰탕' 한 그릇에 담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