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때 여행업계를 호령하던 세중의 영업이익이 10분의 1로 크게 줄었다. 반면 호텔신라의 여행 사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삼성그룹 전체 임직원 출장 상용 물량의 이동이 있었다.
“삼성 직원 중 하루 200명은 하늘 위에 있다.” 2017년 초까지 삼성의 해외 출장 서비스를 담당했던 인사의 말이다. 해외 지사나 공장이 많은 국내 대기업의 직원들은 그만큼 해외 출장이 빈번하다. 삼성의 경우 평균적으로 하루 200여 명은 해외 출장을 떠난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얘기다.
여행사 중에는 기업의 출장 업무를 도맡아 상용 서비스를 주로 하는 여행사들이 있다. 상용 여행 서비스는 특정 기업 소속 직원들의 해외 출장 시 필요한 항공과 호텔, 현지 필요 서비스 등을 전담한다. 일반적인 여행 상품과 달리 가격경쟁을 할 필요가 없고 출장 업무 특성상 일정 변경이 많아 수익성보다는 각 업무 상황을 고려한 예약 변경과 유동적인 서비스가 우선이다.
그래서 마진율도 일반 여행상품에 비해 높다. 제로 마진이라는 항공에도 일정 수수료를 붙일 수 있고 호텔과 기타 예약 서비스 등에서도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다. 윗선의 관계에 의한 것이건, 입찰을 통한 것이건, 일단 특정 기업의 전담 여행사가 되고 나면 경쟁 없는 ‘알짜수익’을 보장 받는다. 비교 대상이 없고 독자적인 서비스를 하다 보니 일반적인 여행상품에 비해 2~2.5배의 마진을 붙인다. 통상 5%대다.
그러다보니 윗선의 관계에 의해 기업 전담 여행사가 정해지는 건 비일비재하다. 특히 물량이 많은 대기업 전담 여행사는 업계에서는 어떤 줄을 대서라도 따고 싶은 ‘황금알’이다. 하지만 쉽게 얻어지는 이권도 아니다. 기업 중에는 물량을 외부에 넘기기 아까워 여행사를 직접 자회사로 꾸리기도 한다. 옛 현대그룹은 현대백화점 자회사로 현대드림투어를 설립해 그룹의 물량을 몰아주고, LG그룹의 해외 출장 물량은 오너 친인척이 사장인 레드캡이 전담한다.
# 삼성-세중, 30년 끈끈한 관계 시들해진 이유
삼성은 지난 30여 년간 세중에 여행 일감을 몰아줬다. 천신일 세중 회장이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나 이건희 회장과 각별한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것은 여행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천신일 세중 회장과 고 이병철 회장과의 인연은 전설이나 신화처럼 떠돈다. 한국전쟁 당시 피신할 곳 없던 이병철 회장을 천신일 회장이 몇 개월간 숨겨줬다는 이야기도 있고, 고려대 정외과를 나온 천 회장이 이건희 회장의 과외 선생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병철 회장이 아들 이건희 회장에게 천 회장을 사업에 꼭 필요한 집사와 같은 동지로 만들어 주려고 했다는 말도 있다. 천신일 회장은 업계에서 ‘타고난 로비스트’라고도 소문 나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고려대 61학번 동기로 대선 기간에도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과 30여 년간 각별한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건 과거의 단순한 인연이나 은인이라서가 아니라 삼성이 직접 나설 수 없는 비즈니스에 천 회장이 줄을 대거나, 사업상 발생하는 다양한 일들의 뒤처리(?)를 지속적으로 해줬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나돈다. 레슬링을 좋아했던 이건희 회장과의 관계 덕인지 몰라도 천 회장은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직까지 맡은 바 있다.
한때 삼성카드가 삼성그룹의 상용 여행 물량에 손을 대려고 하자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에서 세중이 계속 삼성의 상용 물량을 전담할 수 있도록 입장정리를 해줬다는 전언도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의 진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세중이 삼성과 각별한 사이였고 30여 년간 삼성으로부터 받은 여행 비즈니스를 기초로 성장한 회사라는 사실이다. 그런 세중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2017년 초중반을 기점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삼성 전담 여행사라는 타이틀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세중이 도맡던 삼성의 상용 물량은 현재 호텔신라 자회사 SBTM에서 대부분 처리하고 있다. SBTM은 2017년 10월에 설립됐다. 삼성그룹의 상용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호텔신라는 사내에 있던 여행사업부를 분리해 자회사까지 만든 셈이다. 호텔신라는 덕분에 지난해 항공 발권량에서 기존 여행사들을 제치고 단번에 상위권에 올랐다.
# 호텔신라 자회사 SBTM, 삼성그룹 상용 물량 전담
삼성그룹 관련 항공 발권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호텔신라가 SBTM이라는 상용 여행 자회사를 만들기 전인 2017년 중반 경부터 세중으로부터 삼성의 항공 물량을 먼저 거두어 들였다”며 “호텔신라 여행사업부에 아직 대량의 항공 물량을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넘겨야 하는 통해 직원들이 보름 가까이 밤을 새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뭔가 급한 모양새였다”고 말했다.
이 여파로 세중 직원수는 380여 명에서 최근 100여 명까지 급감했다. 지난 2월 21일 금감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세중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8억 23만 원으로, 전년 79억 7201만 원 대비 90% 감소했다. 매출액은 1278억 1209만 원으로 전년 1583억 5096만 원 대비 19.3% 줄어들었다. 세중은 매출액 또는 손익구조 변동 주요 원인으로 ‘삼성전자 및 계열회사와의 거래 종료’로 공시했다.
사실 호텔신라에도 10년여 전부터 여행사업부가 존재하기는 했다. 전직 세중 직원은 “삼성의 회장단과 임원급 출장은 호텔신라에서 맡고 일반 간부급과 직원들은 세중이 처리했다”며 “삼성의 회장단이나 고위간부의 해외 출장 시에는 경호와 보안을 위해 외부에 동선 노출을 꺼렸고 프리미엄급의 서비스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위간부의 출장은 주로 항공은 비즈니스석을 이용한다. 회장단의 경우 수행 인력도 꽤 되기 때문에 호텔도 방을 여러 개 빌리거나 한 층을 다 쓰는 상황도 발생한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호텔신라에서 간부급의 출장만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적은 수익은 아니었을 것”이라면서 “면세점 등 기타 사업에 비해 절대 액수가 작더라도 호텔신라 측에서는 새로운 기회를 봤을 것”이라 관측했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호텔신라의 주 사업은 호텔과 면세 사업인데 호텔 사업은 몇 년 사이 포시즌스와 서울드래곤시티 등 도심에 프리미엄급 호텔들이 들어서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중국의 사드 보복 이후 면세 사업에 대한 위험요소까지 지적되며 사업의 다각화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호텔신라가 세중으로부터 여행 사업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한 시기가 사드 보복 사태가 터졌던 2017년 3~4월부터라는 점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란 얘기다.
# 삼성에게도 여행업은 황금알, 세중은 다른 길 찾아야
일각에서는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여행업에 대한 욕심’에 대한 이야기와 ‘팔은 안으로 굽는다’ 혹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나온다. 삼성이 세중과의 30년 거래를 중단한 것은 이건희 회장의 인연이 이제 힘을 다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앞서의 업계 관계자는 “(삼성그룹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집안과 인연 깊은 어른보다는 여동생의 사업을 도와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느냐”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항간에서는 삼성과 세중의 파트너십 ‘유효기간’이 다했다는 분석도 있다. 오랫동안 상용 여행사를 운영해 온 한 여행사 대표는 “세중은 할 만큼 했다. 내가 그정도 했으면 여한도 없을 것”이라며 “세중은 여행 사업이 축소돼도 쉽게 쓰러질 회사는 아니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 하지 않았나. 현금보유량도 많아 여행 사업을 축소하고 다른 방향으로 사업을 돌려야 할 때”라고 의견을 전했다.
이런 여러 분석에 대해 호텔신라 관계자는 “세중과의 협력을 중단했다기보다는 정상적인 입찰 시스템과 기업 효율화를 통해 사업을 진행할 뿐이다. 그룹사 간 결제시스템과 비용처리를 간소화하고 출장 서비스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상용 전담 여행사를 설립한 것”며 “호텔신라의 주력 사업은 호텔업과 면세업인 만큼 그룹 내 출장 업무를 위한 자회사 SBTM은 이를 돕는 역할을 충실히 하며 해외업체의 국내 출장길도 도울 것”이라 밝혔다.
현재 세중은 여행 사업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발 및 공급사인 (주)세중에스앤씨, 항공운송업인 (주)세성항운 등 여러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운송사업도 삼성전자의 반도체, 휴대전화, 가전 등과 관련한 물류 사업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어 어떤 영향을 받을지 주목된다. 이번 사안에 대해 ‘비즈한국’이 접촉한 복수의 세중 관계자들은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앞서의 전직 세중 직원은 “작더라도 새로운 파트너사들과 제휴하기 위해 영업부서는 전에 없이 공격적인 영업 방침을 내리고 있다”고 내부 상황을 전했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bizhankook.com[핫클릭]
·
'레드오션' 여행시장에 뛰어든 쿠팡·위메프·티몬의 항로
·
토종 마이리얼트립·글로벌 에어비앤비 '통합앱 도전' 앞과 뒤
·
'대륙의 스케일' 중국계 여행사 씨트립, 한국에 공들이는 이유
·
상장 성공 '노랑풍선' 두 마리 토끼 잡을 수 있을까
·
예약부도 '아고다 사태'와 계열사 부킹닷컴의 결정적 차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