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어떤 드라마는 수십 년이 흘러도 장면 하나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다. ‘여명의 눈동자’가 그렇다. 1991년 10월 방영을 시작해 이듬해 2월 종영했으니 벌써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건데도, ‘여명의 눈동자’를 거론하면 “아, 그 철조망 키스신!” 혹은 “최재성이 뱀 뜯어먹던 장면!”을 외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오죽하면 1990년생인 막냇동생도 ‘여명의 눈동자’가 철조망 키스신 나온 드라마라는 걸 알 정도이니,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셈.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문자 그대로 격동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여명의 눈동자’는 윤여옥(채시라), 최대치(최재성), 장하림(박상원)이라는 세 명의 젊은이를 중심으로 그 엄혹한 격동의 세월을 조명하는데, 주인공들이 겪은 그 참담한 일들이 모두 역사에서 비롯된 사실이라는 점이 가슴 아플 정도다.
일본군 위안부(드라마에선 ‘정신대’)로 끌려가던 여옥이 일본군 장교에게 강간을 당하는 시작부터 암울하다. 중국 낙양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던 여옥은 북경대학을 다니다 학도병으로 징집된 조선인 대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나라를 빼앗겨 고난을 겪고 있는 동병상련의 처지, 죽지 못해 사는 그 상황에서 그들의 사랑은 살고자 하는 절실한 의지였을 것이다.
여옥이 대치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대치가 버마(현 미얀마)의 임팔 작전에 투입되면서 기약 없는 이별을 맞는다. 이때 이별하면서 두 사람이 아슬아슬 철조망에 의탁해 애절하게 나누는 키스신이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키스신으로 꼽히는 바로 그 장면.
한편 동경제대 의학부 학생이던 하림도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중국으로 끌려왔다가 731부대의 미다 대위(김흥기) 밑에서 일하게 된다.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한 그곳은 끔찍한 생체실험이 자행되던 곳으로, 이곳에서 실험하던 내용을 바탕으로 미다 대위와 하림은 세균전을 벌이고자 사이판으로 이동하게 된다.
하림은 사이판에서 여옥을 만나게 되는데, 임신 중이던 여옥에게 연민을 느끼고 돌보게 된다. 이 드라마에는 명대사 명장면이 판을 치는데, 자신을 왜 돕는지 묻는 여옥에게 하림이 했던 답변도 인상적이었다. “사람이란 자기 힘으로 남에게 뭔가를 해줄 수 있을 때 살 맛이 나는 게 아닌가요?”
여옥과 대치, 하림 세 사람의 인생 역정은 이 짧은 글 안에 이루 다 쓸 수 없을 지경이다. 당장 여옥만 해도 위안부였다가 미군의 권유로 CIA의 전신인 OSS 훈련을 받고 국일관 기생으로 잠입하여 미군에게 정보를 넘기며 독립운동에 가담하다가 잡혀 고문을 받다가 해방이 되어 풀려난다. 이후 미군정 타이피스트로 일하며 하림과 결혼하려다 공산주의자가 된 대치와 재회하며 스파이가 되어 미군의 정보를 빼돌리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사형수가 된다(헉헉, 숨이 막힌다).
여옥의 남편 대치는 어떤가. 학도병이었던 그가 버마로 끌려가 뱀을 날로 씹어 먹으며 살아 남았다가 중국 팔로군에 있던 공산주의자 김기문에 의해 구출되며 공산주의자 팔로군이 되더니 전쟁의 트라우마로 점점 냉혹한 전쟁광이 되어 팔로군에서 쫓겨나더니 마적에게 잡혀 마적단이 된다.
그러다 조선인을 학살하려는 마적단에 대항하려다 우여곡절 끝에 소련군에게 구출되며 다시 공산주의 진영으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남한 철도 파업과 제주 4·3 사건 등 굵직굵직한 일들마다 참여해 있다 북에서 사상 문제로 탄광에 끌려가 죽을 뻔 하고는 한국전쟁으로 다시 내려와 낙동강전투에서 참패하며 빨치산이 된다.
하림 또한 마찬가지. 학도병으로 끌려가 731부대에서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일들을 보다가 사이판에서 겨우겨우 세균전을 막아내어 어쩌다 미군정에서 일하면서 OSS 훈련을 받고는 여옥과 함께 미군을 돕게 된다.
해방이 되고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는 친형과의 반목, 그리고 해방 전까지 자신을 고문하던 악질 친일파 형사 스즈키(박근형)가 최일도라는 이름으로 경찰서장이 되어 있는 걸 보고 분노하여 다시 미군정으로 돌아간다. 미군 소속으로 월북 간첩이 되어 북한에 잠입하거나 미군 정보장교로 4·3 사건의 양민 피해를 막으려 애쓰고, 전투경찰이 되어 빨치산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는 등 전천후로 활약한다.
1943년부터 1951년까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주인공들은 나라 잃은 설움으로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다가 나라를 되찾은 후에도 미군과 소련, 좌우 진영으로 갈리며 극심한 혼돈과 혼란의 시기를 보낸다. 차라리 일제강점기였을 때는 일본이라는 공공의 적이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강대국과 진영의 논리에 휘말려 같은 민족과 형제와 이웃이 총칼을 겨눈다.
그 와중, 일제강점기에서 안위를 누리던 친일파들이 해방이 되어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막힌 모습도 보인다. 최일도 서장이 되어 있는 스즈키 형사를 보며 “네가 왜 여기 있어! 해방이 됐어, 스즈키!”라며 절규하던 하림의 모습이 얼마나 가슴 아프던지. 월북 간첩이 된 하림이 만난 소련군 스파이 명지(고현정)의 대사도 기억난다. “난 공산주의가 싫은 게 아니에요. 그냥, 그 ‘주의’가 싫어요. 사람 빼고 사상만 있는 게 난 싫어요.”
전쟁이라는 광기가 휘몰아치는 공간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악하고 피폐해질 수 있는지, 진영의 논리로 무고한 사람들이 어떻게 희생되는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약한 인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야 하는지를 ‘여명의 눈동자’는 찬찬히 보여주고 생각하게 만든다.
정신대와 731부대, 4·3 사건과 한국전쟁 등 가슴 아프고도 민감한 역사를 조명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의가 있는 작품인데, 심지어 지금 봐도 퀄리티가 훌륭하다. 제작비 72억 원과 해외 로케이션 같은 외적인 요소 외에도 요요한 얼굴에 형형한 눈빛으로 여옥을 구현한 채시라를 비롯해 배우들의 연기가 워낙 빼어나 차마 리메이크할 수 없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
삼일절을 앞두고 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층 열기가 뜨거운 2019년. 마침 ‘여명의 눈동자’는 3월부터 뮤지컬로도 무대에 오른다.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걸’ 되뇌던 여옥, 너무나 치열하게 살아 그만 쉬고 싶다던 대치, ‘남겨진 자는 희망을 갖고 무정한 세월을 이겨내야겠지’ 하던 하림의 삶과 외면하고 싶을 만큼 엄혹했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기 좋은 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으므로.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핫클릭]
·
[올댓튜브] 오눅의 브이로그 'VOVO커리, 허둥지둥 잡지 촬영…'
· [올드라마]
여전한 웰메이드 '그들이 사는 세상'처럼 살기를
· [올드라마]
좀비보단 뱀파이어 '안녕, 프란체스카'
· [올드라마]
명절에 보면 더욱 공포스럽고 기괴한 '솔약국집 아들들'
· [올드라마]
설날이면 그리워지는, '곰탕' 한 그릇에 담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