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난번에 한국에 갔을 때 국내 대기업에서 전략 기획을 담당하는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친구가 일하는 회사는 CVC(Corporate Venture Capital)의 형태로 국내외 스타트업들에 활발히 투자하고 있어 자연스레 프랑스 스타트업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요새 프랑스에서 가장 잘나가는 비트코인·블록체인 스타트업의 창업자는 프로 포커 선수 출신이다.” 필자의 말에 친구는 피식 웃었다. 최근 몇년간 한국에 암호화폐(가상화폐) 광풍이 불어 닥쳐 온갖 군상이 판에 모여들었던지라, 프로 도박사는커녕 서커스 출신이 비트코인 사업을 한다 해도 별로 놀랍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창업자가 명문 이공계 그랑제콜 출신의 수재이며, 프로 도박사로 활동한 경력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고, 그 전후로도 이미 여러 개의 스타트업을 창업하여 성공적으로 엑시트(Exit) 한 경력의 소유자라면 얘기가 좀 다르지 않을까?
암호화폐를 저장하는 하드웨어 지갑을 생산하는 ‘렛저(Ledger)’의 창업자 에릭 라슈벡(Éric Larchevêque) 이야기다. 라슈벡은 실제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프로 포커 선수로 활약했는데, 정작 본인은 이 경력을 딱히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 현재 회사 소개나 기타 다른 기사 등을 봐도 이 내용은 없으며 인터뷰에서도 포커 얘기는 전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래된 인터넷 기록을 뒤져보면 당시 그의 활약상을 어느 정도 추적할 수 있다. (한번 인터넷에 올라온 기록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1974년생인 라슈벡은 파리 고등전기전자 공대를 졸업한 직후인 1996년부터 창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장 성공적인 창업은, 유럽의 온라인 미팅·커뮤니티 플랫폼을 차례차례 인수·통합하여 성장시킨 몽토게일 그룹을 2007년 프랑스 핀테크 기업의 효시로 불리는 렌타빌리웹에 2200만 유로(280억 원)에 매각한 것이다.
이후 가족과 함께 동유럽의 라트비아로 이주한 그는 매각 대금으로 오래된 고성 몇 개를 사들여 호텔로 개조하는 한편 뜬금없이 프로 포커 선수로 데뷔하더니 불과 2년 만에 유럽 포커 투어(EPT: Europe Poker Tour) 결승전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한다. 필자도 이 분야에 문외한이라 잘 알지 못하지만 우승 상금이 백만 유로에 달하는 큰 대회라고 한다. 라슈벡은 이전에 이미 크고 작은 대회에서 거둬들인 누적 상금 액수가 70만 유로에 이르렀다고 한다.
데뷔 2년 만에 챔피언 등극의 기대를 한껏 모으던 라슈벡은 준결승부터 급격한 컨디션 난조를 보이면서 급기야 결승전에서 무력하게 패하더니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포커 전문 매체와 가진 고별 인터뷰를 찾아보니, 그는 EPT 진출 초기에 이미 포커에 깊은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호텔 체인을 사들여 개발·운영하면서 구체적이고 건설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묘미에서 보람을 느끼던 그로서는 도무지 생산적인 것이라고는 없는 포커판에서 끝모를 공허감을 느꼈다는 것. 한창 승승장구하던 시절, 라슈벡은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 인공지능 포커 플레이어를 구상하고 직접 코딩해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투입되는 노력 대비 결과가 신통치 않음을 깨닫고는, 그 정도의 인공지능을 개발할 능력이 있다면 좀 더 생산적인 다른 곳에 사용하는 것이 100배는 더 가치 있겠다 싶어 미련 없이 접었다고 한다.
이후 스타트업 업계로 돌아온 라슈벡은 이번에는 모바일 가격 비교 사이트인 ‘프리싱(Prixing)’을 창업하여 역시 성공적으로 매각한다. 2013년 블록체인을 접한 라슈벡은 분산형 컨센서스 기술이야말로 90년대 인터넷에 필적하는 혁명적인 기술이 될 거라 확신하고, 그해에 파리에 ‘La Maison du Bitcoin’을 설립한다. 이곳은 유럽 최초로 일반인이 비트코인을 사고파는 물리적인 공간이면서 동시에 암호화폐 관련 스타트업들의 인큐베이터 역할도 했다.
사실 라슈벡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이곳에 모인 암호화폐 스타트업 중에 알짜를 골라내어 자신의 블록체인 회사를 창업하는 것. 그는 특히 하드웨어, 즉 물리적 기술의 구현에 관심이 있었다. 2015년 라슈벡은 암호 키를 저장하는 칩을 설계하던 BTChip과 우체국을 통해 보안키를 발송하여 비트코인을 판매하는 사업 모델을 가졌던 ChronoCoin(프랑스에서는 우체국 택배를 ‘ChronoPost’라고 한다)의 기술과 인력을 합병하여 ‘렛저’를 창업한다.
앞서 말한 대로, 렛저는 암호화폐 하드웨어 지갑을 개발, 생산, 판매한다. 라슈벡은 겉으로는 작은 USB 드라이브처럼 보이는 이 기기가 비트코인을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디지털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할 뿐 아니라 디지털 신분 보장, 통신 내역 안전화 등 향후 개인의 보안 기기로 필수적인 역할을 할 거라고 주장한다.
렛저의 지갑인 ‘나노 S’는 2017년 한 해에만 165개국에서 100만 개 이상이 판매되었으며, 이를 통해 4600만 유로(590억 원)에 달하는 매출을 달성하였다. 창업 2년 차이던 2016년의 매출이 60만 유로(7억 원)였으니 엄청난 성장이다. 2018년에는 시리즈 B 펀딩을 통해 7500만 유로(950억 원)의 자금을 확보하였다.
현재 파리 남쪽의 작은 마을인 비에르종의 오래된 도자기 공장 터를 인수해 생산 시설을 확충하는 한편, 기업용 암호 화폐 솔루션인 ‘볼트(Vault)’를 개발 중이다. 이는 은행, 펀드 또는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신탁재단 등이 암호화폐에 기반한 자산 포트폴리오를 관리할 수 있는 SaaS(Software as a Service) 솔루션이면서, 하드웨어 보안 기술을 활용하여 센서와 기기를 스마트 컨트랙트로 연결하는 산업용 IoT로까지 활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에릭 라슈벡은 스스로가 레드불과 피자만으로 버티며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코딩에 몰두할 수 있는 ‘뼛속까지 개발자’임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의 행보에서 보듯이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에 열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돈은 벌 만큼 벌었고(나노 S에 시험 삼아 1000비트코인 정도를 담아두었다고 한다. 2019년 2월 현재 42억 원에 달하는 액수다), 몇 번 은퇴 경험도 있는 그가 암호화폐에 열정을 쏟는 것은, 블록체인이 21세기 경제와 사회를 송두리째 바꿀 파괴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팅 사이트를 만들고 도박판에서 성공하는 것으로도 채울 수 없었던 이 천재 개발자이자 사업가(그리고 도박사!)의 목마름을 블록체인이 채워줄 수 있을까.
필자 곽원철은 한국의 ICT 업계에서 12년간 일한 뒤 2009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현재 프랑스 대기업의 그룹 전략개발 담당으로 일하고 있으며, 2018년 한-프랑스 스타트업 서밋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기재부 주최로 열린 디지털이코노미포럼에서 유럽의 모빌리티 시장을 소개하는 등 한국-프랑스 스타트업 교류에도 힘쓰고 있다.
곽원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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