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대체적으로 드라마에 관대하지만, 그럼에도 자주 신랄하게 한국 드라마를 잘근잘근 씹게 된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다수가 수준급 드라마 평론가 아니던가. 게다가 최근 몇 편의 기대작이 화제작이 치솟았다가 망작급 결말로 경악을 금치 못한 광경을 보면서, 잘 만든 드라마를 보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다. 그래서 다시 봤다, ‘그들이 사는 세상’을.
‘그들이 사는 세상(그사세)’은 ‘웰메이드 드라마’군의 대표작 중 하나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웰메이드 드라마는 많은 경우 ‘마니아 드라마’ ‘폐인 드라마’와 직결되곤 한다. ‘그사세’ 또한 그랬다.
시청률은 낮지만 항상 마니아층을 불러 모으는 노희경 작가의 대본에 표민수, 김규태 PD의 연출, 송혜교와 현빈이라는 스타 배우의 출연은 대박 드라마를 보증해 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시청률이 낮아도 너무 낮았다. 지금도 ‘그사세’의 시청률 실패는 놀라운 이변으로 꼽힌다.
시청률과 상관없이 몇 년이 지나도 촌스럽지 않고, 허세가 없으면서, 여전히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드라마가 ‘그사세’다. ‘그들’은 방송국 PD와 수많은 스태프, 작가, 배우, 매니저 등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밤을 지새우고 피땀 흘리는 일련의 사람들을 뜻한다.
사람들에게 웃음과 울음, 대리 분노와 위안을 선사하는 마력의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니, 그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미 같은 해인 2008년 상반기에 그와 비슷한 ‘온에어’가 인기를 끌었으니 ‘그사세’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방송국 드라마 PD로 일하는 정지오(현빈)와 주준영(송혜교)는 대학 당시 잠시 사귀었던 선후배 관계다. 그들은 헤어져 각자 이연희(차수연)와 강준기(이준혁)이라는 연인을 두지만 최근 헤어진다. ‘그사세’는 바람 잘 날 없는 드라마국에서, 지오가 연출하는 작품이 사고로 재촬영을 하며 준영과 마찰을 빚게 되는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가슴 속에 감정이 남아있는 옛 연인과의 마찰. 그렇다. 이 드라마는 흔히 한국 드라마를 폄하할 때 흔히 쓰이는 ‘일하는 곳에서 연애하는 드라마’다. 지오와 준영은 다시 연인관계가 되어 치열하게 사랑하지만, 또 치열하게 일을 하며 드라마를 만든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드라마를 만드는 동료들 또한 대거 그들의 역할에 충실하며 드라마를 완성한다.
시청률 보증수표지만 싸가지가 없어 드라마국의 악역 포지션인 PD 손규호(엄기준), ‘미친 양언니’로 불릴 만큼 걸어다니는 사고뭉치인 조연출 양수경(최다니엘)과 군인 같은 말투로 전쟁 같은 드라마국을 헤쳐 나가는 조연출 ‘김군’ 김민희(이다인), 드라마국을 진두지휘하는 국장이지만 옛 연인만 오매불망 바라보는 순정파 김민철(김갑수)와 허허실실 웃음으로 김민철을 보필하는 드라마국 CP 박현섭(김창완) 등 수많은 PD들은 당연.
김민철의 순정을 받는 화려한 배우 윤영(배종옥), 폭탄머리로 툭툭 시니컬한 말을 던지지만 마음이 따스한 작가 이서우(김여진), 나이 든 배우들의 신산하고도 평범한 삶을 보여주는 배우 오민숙(윤여정)과 박수진(김자옥)과 정일우(이호재), 그리고 나이 든 배우들과 대조적으로 밝고 톡톡 튀는 신인 여배우 장혜진(서효림) 등등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물론 극의 중심은 주인공 커플인 지오와 준영의 감정에 따라 흐르지만, ‘그사세’는 드라마를 만드는 그들의 삶을 담담하게 보여줘 사랑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스러웠던 것은 오민숙, 박수진, 정일우로 대표되는 나이 든 배우들의 모습. 인생의 화려한 순간은 지나갔을지언정 담담하고 성실하게 솔직하게 삶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같이 드라마를 만듦으로써 서로 우정을 쌓고 연대하는 모습들은 또 얼마나 따스했나. 남과 마음을 터는 법을 몰랐던 준영이 지오와 헤어지고 이서우 작가와 배우 윤영, 조연출 등을 불러 목 놓아 우는 장면이나 좌천되는 후배 PD를 위해 돼지갈비집에 삼삼오오 모이던 드라마국 사람들의 모습은 언제나 훈훈하다.
어쩌면 ‘그사세’가 시청률 경쟁에 실패한 이유는 너무 판타지가 엷어 삶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방송가 사람들이 이 드라마가 충실히 방송가 풍경을 담아냈다고 증언했는데, 그래서인지 드라마 PD를 고려하던 내 동생은 ‘그사세’를 보고 그 마음을 접어버렸다. “언니, 난 도저히 그렇게 일하진 못할 거 같아.”
여느 드라마라면 지오와 준영의 헤어짐에 좀 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살인자라든가 불치병에 걸린다든가 하다못해 ‘그사세’의 손규호처럼 아버지의 대권 도전 때문이라든가 하는 거창한 이유.
하지만 사실은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자격지심 같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이유로 헤어졌다. 그러다 다시 만나는 것 또한 거창한 이유가 없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니까. 드라마를 만드는 그들은, 드라마국의 신조처럼 드라마처럼 산다. 드라마처럼 사는 게 별건가. 인생이 곧 드라마 아니던가.
그래서 ‘그사세’를 보고 나면, 볼 때마다 삶을 충실히 살고 싶다는 기운을 받는다. 드라마처럼 뜨겁게 사랑하고, 드라마처럼 치열하게 일을 사랑하고, 드라마처럼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는 열정적인 기운 말이다.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런 기운을 불어넣는 작품을 우리는 ‘웰메이드’라 부른다. 그러니 모두, ‘그사세’의 사람들처럼 하루하루 드라마처럼 살기를.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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