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은 영국의 보수당으로 알려져 있다. 전신인 토리(Tory)당이 결성된 것이 1678년이었으므로 이미 300년이 훌쩍 넘었다. 처칠, 대처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지만 ‘보수 대학살’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선거에 참패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영국의 보수당은 그때마다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유권자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았다. ‘제3의 길’을 주창한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 참패한 이후 ‘따뜻한 보수주의’를 지향하며 불과 39세의 데이비드 캐머런을 당대표로 선출하여 재집권한 것이 단적인 예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가 쓴 ‘정당의 생명력: 영국 보수당’에는 그 파란만장한 역사와 국민들로부터 인정받으며 생존한 원동력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박 교수는 보수당의 성공을 이끈 요인들로 △과거의 실패를 두고 지나치게 오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재정비에 나서는 결속 △이데올로기나 실천에서 모두 유연성과 현실 적응을 보여주는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처 △국가경영 능력과 통치에 적합한 정당 이미지 △계급과 이해관계를 아우르는 국민의 당 등을 지적했다. 박 교수의 책은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대선 패배 이후 보수당의 역사를 읽으며 당 혁신의 길에 대한 시사점을 얻게 했다고 해 화제가 됐다.
오는 27일 자유한국당 대표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당내 유력인사들이 대거 출마선언을 했을 뿐만 아니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의 지지율 격차가 불과 8%밖에 나지 않아 당내 분위기는 모처럼 활기찰 것으로 보였지만 돌발변수가 터졌다.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불을 댕긴 것은 홍준표 전 대표다. 홍 전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탄핵도 국민들의 뜻이고 용서도 국민들의 뜻”이라면서 “이제 용서해야 할 때”라고 본다며 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위한 국민저항운동을 시작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김진태 의원 등 다수 후보들도 비슷한 입장이다. 반면 황교안 전 총리는 입당 기자회견에서 국민통합을 강조했을 뿐 탄핵과 사면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피했다. 오세훈 전 시장은 출마선언을 통해 국민적 심판이었던 탄핵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박 전 대통령을 극복할 것을 주문했다.
유력 후보들 생각이 드러나자마자 박 전 대통령을 유일하게 만난다는 유영하 변호사가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 황 전 총리가 권한대행 시절 박 전 대통령이 수차례에 걸쳐 교도소 측에 허리가 안 좋으니 책상과 의자를 넣어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반영되지 않았고, 황 전 총리의 면회신청을 거절했다면서 “황 전 총리가 친박이냐는 것은 국민들이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비판했다. 이에 황 전 총리는 박 전 대통령에게 도리를 다했다고 해명을 했지만 자칫 박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이라도 등장하게 되면 그 파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거두절미하고 한국당이 보수의 부활을 꿈꾼다면 박 전 대통령과 확실한 선을 그어야 한다. 현재 박 전 대통령은 공천에 개입한 혐의로 징역 2년이 선고된 사건이 확정되었을 뿐, 최순실과 공모해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2심에서 징역 25년 선고를 받은 사건이 대법원에,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받은 혐의로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 받은 사건은 고등법원에서 진행 중이다. 주된 재판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면이 논의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중형이 선고된 마당에 법원이 구속취소를 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유력후보로 꼽히는 세 분 모두 법률가 출신이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박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탄핵된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인 국민들이 석방을 요구하고 탄핵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표현의 자유이며 심정적으로 이해가 간다. 그러나 명색이 제1야당 대표후보이자 차기 대통령후보가 될 수도 있는 분들이 단지 대표 선거에서 ‘친박정서’를 얻고자 석방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유력후보로 꼽히는 분들은 박 교수가 열거한 보수당의 성공을 이끈 요인들을 곱씹어 보길 바란다. 한국당의 지지율 상승은 현 정권의 실착에 따른 반사적 효과임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실착을 제대로 분석해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새로운 보수의 가치를 제시해야지 또 다시 친박이냐, 비박이냐로 싸우는 것이 국민의 요구는 아니다.
이 점에서 지난 9일 한국당의 전신인 민자당이 정립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당내에서 폭동이라고 왜곡하여 국론분열을 야기한 일에 따끔하게 꾸짖는 후보가 하나도 없다는 점은 상당히 안타깝다. 내년 총선을 전두지휘 할 대표를 선출할 한국당 전당대회가 영국 보수당을 벤치마킹할 수는 없는 걸까.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한규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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