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요즘 ‘솔약국집 아들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에서 10년이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할 수 있는 시간인가를 실감한다. 2009년 방영한 주말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은 변화무쌍하던 2000년대의 끝자락에서 가족의 판타지를 부여잡으며 인기를 누렸다. 최고 시청률 44.2%. 당시 아름다운 판타지로 채색됐던 이 작품은 그러나 2019년의 눈으로 보면 살짝 기괴한 블랙코미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54부작으로 구성된 ‘솔약국집 아들들’은 혜화동 골목에 사는 대가족 아들들의 장가보내기 프로젝트라 명명할 수 있다. 솔약국을 운영하는 송진풍(손현주)은 성실한 장남의 표본으로, 흔히 어른들이 ‘진국’이라 평가하는 사람이지만 장가를 가지 못해 어머니의 속을 까맣게 태운다.
최고 대학 의대 수석이라는 타이틀이 빛나는 소아과 의사 둘째 송대풍(이필모)은 허우대 멀쩡하고 입담이 좋지만 여러 여자를 전전하는 바람둥이다. 방송국에 수석으로 입사한 기자인 셋째 송선풍(한상진)은 7개 국어를 구사하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지만 꾸밀 줄 모르고 고지식해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다.
아직 결혼과는 거리가 먼 막내 송미풍(지창욱)은 재수생이지만 공부보다는 수예나 자수 등 아기자기한 것에 취미가 많아 어머니의 애를 태운다. 여기에 몇 년간 통장을 역임하며 동네 대소사에 관심(간섭)을 두는 할아버지(변희봉)와 건설회사 소장인 아버지 송광호(백일섭)와 어머니 배옥희(윤미라)로 구성되는 대가족이 일명 동네에서 ‘솔약국집’으로 명명되는 이들이다.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판타지야 지금 현재도 주말드라마에서 툭하면 등장하는 설정이니 그렇다 치지만, 마흔 살과 서른일곱, 서른다섯인 성공한 전문직 남성들이 단지 결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독립하지 않고 육십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밥을 얻어먹으며 산다는 설정은 2019년에는 더 이상 용납되기 힘들다. 결혼이 선택을 넘어서서 심지어는 기피의 대상으로 전락(!)한 지금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 큰 아들들에게 매타작을 놓으며 쥐 잡듯 잡는 어머니 옥희의 행동도 이제는 기이해 보인다.
심지어 아들들의 결혼이 그토록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옥희의 행동은 무시무시하다. 진풍이 사랑하는 앞집 여자 이수진(박선영)이 똑똑한 국제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아내 잃은 친정오빠와 어린 조카 둘 때문에 결혼이 늦어질 것을 염려해 반대하거나, 셋째 선풍이 결혼하는 인기 탤런트 오은지(유하나)는 직업과 오만한 안사돈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엄마가 반대하는 여자는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남편이 둘째 대풍의 짝으로 김복실 간호사(유선)가 어떠냐고 묻자 자기 신상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아 근본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꺼려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지난 3년간 끼니를 함께하며 가족처럼 지내온 사이임에도 말이다!
또한 ‘솔약국집 아들들’은 ‘남자라면~’ ‘여자가 말이야~’ 등의 고정된 성 역할을 충실히 전달하기도 한다. 한국으로 스카우트될 정도로 똑똑한 국제 변호사여도, 실력 있는 간호사이면서 사실 미국 존스홉킨스대를 나온 신경외과 의사여도, 집안 좋고 인기 많은 탤런트여도, 결혼하면 ‘며느리’라는 역할을 부여 받아 아침부터 식구들의 식사를 차리고 동네 반상회의 주전부리를 챙겨야 하는 존재임을 공고히 한다. 지금 여성들이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솔약국집 아들들’은 재미나다. 순간순간 코믹 연기가 빛을 발하는 손현주와 대놓고 능글능글한 연기를 선보이는 이필모는 물론이요, 네 아들들이 펼치는 합동 공연 같은 장면은 온 가족이 보아도 재미있을 만하다. 이들은 객관적으로 잘났음에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여 위화감도 적다.
게다가 ‘솔약국집 아들들’은 ‘과거 따스했던 시절, 가족이 주는 힐링’의 끄트머리를 붙잡으며 중장년층의 판타지를 충족시켜 준다. 내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지도 못할 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은 이 시대에, ‘솔약국집 아들들’의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사고를 치고 아이를 낳은 철없는 모녀를 돌보고, 사연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아들의 직원을 가족처럼 대하고, 엄마를 잃은 이웃의 아이를 정으로 감싼다.
이는 솔약국집으로 시집오게 되는 며느리들의 상황에서 더 확실해진다. 일찍 부모를 여읜 첫째 며느리는 시부모의 넓은 아량으로 분가를 허락 받아 엄마 잃은 조카들을 돌볼 수 있게 됐고, 유명 병원장의 혼외자여서 상처가 있던 둘째 며느리도 시댁어른들의 너른 품안에서 가족의 정을 느끼게 된다. 사랑으로 이뤄진 대가족이라면 모든 걸 치유할 수 있다는 판타지다.
잘 성장하여 결국 결혼까지 쟁취한 아들 내외들이 엎어지면 코 닿을 한 동네에 살고, 사돈끼리도 친밀하게 지낸다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들 내외 모두 시댁으로 놀러와 자고 가는 한밤중에 시어머니가 마당에서 집안을 둘러보며 ‘그래, 내 인생도 이 정도면 훌륭하지’라고 자위하며 흐뭇해하는 다분히 공포스러운 광경으로 끝난다. ‘솔약국집 아들들’이 중장년층, 아니 더 정확히는 시어머니의 거대한 판타지라는 확증 같은 장면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이 드라마를 반면교사 삼아 아들 둘과 딸 셋을 둔 우리 엄마에게 21세기 시어머니의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중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어떻게 대하면 된다고?” “아들의 친한 친구!” 물론 잘될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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