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 여자가 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망국의 가난한 양반집 딸로 태어나,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부잣집에 민며느리로 시집을 간 순녀. 시가는 한여름만 빼고는 철철이 남정네들 몸보신을 위해 곰탕을 끓이는 집이었다.
어렸던 순녀는 그때부터 아흔을 바라보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평생을 곰탕을 끓이며 살았다. 1996년 방영한 2부작 SBS 설특집극 ‘곰탕’은 곰탕집 ‘진미옥’을 40년간 운영해 온 순녀의 삶을 다룬 드라마다.
지금이야 재미가 덜하지만 예전에는 명절이면 방송사마다 특집극에 힘을 기울였다. 이름난 방송작가와 연출가가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데리고 2~4부작 형식으로 온가족이 함께 볼 만한 가슴 훈훈한 내용의 이야기보따리를 펼쳤고,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자연스레 TV 앞에 모여 드라마를 보며 이야기보따리를 풀곤 했다.
한 여인의 일생을 그린 ‘곰탕’은 지금 시대 눈으로 보면 답답한 구석도 있지만 가끔 생각날 만큼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울밑에 선 봉선화’ ‘노란 손수건’ 등 전통적인 여성의 삶을 그려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박정란 작가와 당시 작가주의 연출가로 이름을 날리던 이장수 PD가 손을 잡고 김혜수, 김용림, 김수미, 한재석, 류시원 등을 기용해 만들어서인지 특집극인데도 소위 ‘때깔’이 좋다는 반응이었다. 그 덕에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뉴욕페스티벌 TV부문 특별상과 휴스턴국제영화제 TV부문 금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주인공 순녀는 가문은 보잘 것 없지만 부자인 충청도 정씨네 집안에 민며느리로 시집을 와 3년 후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곧이어 어린 남편을 서울로 유학 보낸 채 하염없이 전통적 며느리의 삶을 산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찬 물에 손이 불어터져 가며 곰탕을 끓이는 세월. 일제강점기에 돈 좀 있고 학식 좀 든 지식인층이 대개 그랬듯, 순녀의 남편 정인성(류시원)도 서울에서 바람이 난다. 아니, 그 당시로 따지면 그건 바람 축에도 못 끼었을 테다. 조신한 데 없이 촐싹거리며 순녀가 있는 본가까지 쫒아온 남편의 여자 채봉(서혜린)은 흔히 ‘풍각쟁이’로 폄훼하는 배우였으니까.
우격다짐으로 순녀의 방에서 남편과 채봉까지 한 자리에서 자던 밤, 순녀는 품고 있던 아이를 사산하는 아픔을 겪는다. 한 번 바람이 난 남편은 본가에는 가뭄에 콩 나듯 발걸음을 하더니 채봉도 버리고 어느 과부와 눈이 맞아 아들까지 낳는다. 손이 귀한 부잣집에 시집을 와, 아들도 못 낳고 첩에게서 자식을 보게 되는 그 시절 여자의 삶은 얼마나 쓰라렸을까.
자신을 외면한 남편이 사업을 한답시고 남은 집안 재산마저 거덜 내자, 괴나리봇짐 메고 서울로 올라온 순녀가 믿을 것이라곤 딱 두 가지였다. 한때 남편의 여자였으나 이제는 서로 의지하는 친동생 같아진 채봉, 그리고 곰탕 끓이는 솜씨다. 그렇게 순녀는 채봉과 함께 곰탕집 진미옥을 열고 아흔을 바라보는 현재에 이른다.
지금 시대의 눈으로 보면 순녀의 삶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마음을 굳건히 할 자식도 없는 데다 바람난 남편은 순녀의 생활 역시 외면한 데 이어 늙어서는 미국 이민 간 아들네로 가기 위해 허울 좋은 ‘조강지처’의 명목이었던 호적마저 정리하길 요구한다. 요즘 애들 말로 순녀는 ‘고답이’로 보일 터다. 그러나 순녀를 단순히 답답하기만 한 여인으로 보긴 섣부르다. 남편 인성이 순녀를 외면했지만, 순녀의 마음속에는 남편과 함께 시가를 찾은 적이 있던 남편의 친구 박재훈(한재석)이 있었기 때문.
첫 대면 당시 남산만큼 부른 배로 남편의 짐을 들고 낑낑거리는 순녀를 바라보고 짐을 들어준 이가 재훈이었다. 남편의 여자가 본가까지 쫓아와 있는 심란한 상태에서 뜨겁고도 아련한 흠모의 눈길로 순녀를 조심스레 바라본 이도 재훈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빨랫줄에 널려 흔들리는 하얀 이불 빨래 사이로 순녀와 재훈이 거리를 두며 서로를 바라보던 장면이다. 남편의 친구, 친구의 아내인 그들이, 서로 제대로 대화해본 적 없는 그들이 서로를 보던 그 눈길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해방 직후 순녀의 시가에 찾아온 재훈을 위해 순녀가 웃돈을 주고 개고기를 얻어와 곰탕을 끓여 대접하는 장면도 생각난다. 곰탕 한 그릇에 담긴 그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이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뜨겁고도 강렬하며 동시에 조심스럽게 은은한 사랑.
어린 순녀를 연기한 류현경과 젊은 순녀의 김혜수, 그리고 노년의 순녀를 연기한 김용림으로 이어지는 배우들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다. 젊은 채봉의 서혜린도 좋았지만, 늙어 치매에 걸려서도 젊어서 놀던 가락을 잊지 않는 노년의 채봉을 연기한 김수미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도 인상적이었고.
젊은 인성을 연기한 류시원이 조금 어색했지만, 짧은 출연에도 순녀의 마음을 흔들기에 모자람이 없던 한재석의 미모는 시원스러웠다. 그리고 정우성. 신인이었던 정우성이 3·1 만세운동으로 죽음을 맞으며 어린 순녀의 마음속에 첫사랑처럼 각인되는 아저씨와 이후 유신시대던 1970년대에 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데모 청년으로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인이라면 절로 흥에 겨워 고개를 까딱이게 만드는 풍물소리와 한국인이라면 절로 침이 고일 곰탕을 배경으로, 오랜 시간 곰탕 끓이듯 진득하게 살아온 순녀의 삶을 그린 ‘곰탕’. 1919년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격변의 대한민국과 함께 질곡의 삶을 살아낸 단단한 여인 순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SBS 홈페이지 ALL VOD에서 무료로 시청 가능하다. 어지간한 요즘 드라마보다 훨씬 단단하고 격조 있는 작품임을 자신한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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