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를 꼽을 때면 아주 오래전부터 내 대답은 김수현 작가였다. 한국 드라마사에서 김수현 작가만큼 전설로 통하는 이름이 있을까. 물론 특유의 쏘아붙이는 대사 톤과 대가족 중심의 패턴화 된 이야기로 호불호가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시대상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늘었다.
나 역시 ‘세 번 결혼하는 여자’로 실망했고, ‘그래, 그런 거야’로 더욱 실망했지만, 그래도 김수현 작가의 신작이 나온다면 기대를 품고 다시 시청할 의향이 있다. 추천하고 싶은 김수현 작가의 작품은 수두룩 빽빽이지만, 지금 떠오르는 건 1999년에 방영된 ‘청춘의 덫’이다. 올해로 방영 20주년을 맞는, 심은하의 매력이 폭풍처럼 무섭고도 거세게 다가왔던 그 드라마.
‘청춘의 덫’은 우여곡절이 많은 작품이다. 이효춘, 이정길, 김영애, 박근형 주연으로 1978년 MBC에서 50부작 예정으로 방영되었으나 혼전 동거와 혼전 출산이라는 시대를 앞선 파격적인 소재가 검열에 걸리며 조기종영을 당한다.
그걸로 끝났다면 비운의 작품으로 마무리되었겠으나 김수현 작가는 이를 소설로 발표하고, 이듬해에는 영화화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당국에 대한 통쾌한 복수가 아닐 수 없다. 심은하, 이종원, 유호정, 전광렬 주연의 1999년작 SBS 드라마는 그러니까 근 20년의 세월이 지난 뒤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대중을 사로잡은 청춘의 덫은 어떤 내용인가. 결혼을 약속한 남녀가 있다. 청초하고 단아한 윤희(심은하)와 가난하지만 똑똑한 동우(이종원), 그리고 그 사이 태어난 귀여운 딸 혜림(하승리). 사정이 있어 식을 올리지 못했지만 부부와 진배없는 관계다.
문제는 부잣집 딸 영주(유호정)가 동우에게 반하고, 동우가 그에 응답해 윤희를 배신하며 일어난다. 설상가상, 아이가 사고를 당하는데 동우는 아이가 위독하다는 소식에도 윤희와 아이를 찾지 않는다.
자식을 잃고 악에 받친 여자가 복수를 꿈꾸며 동우가 결혼하고자 하는 부잣집 딸의 오빠 영국(전광렬)과 결혼을 감행한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내용.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지. 그토록 통속적인 내용이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는 김수현 작가의 손을 거치면 고품격 통속극이 되니 말이다.
청춘의 덫은 깐깐한 대본을 찰떡처럼 소화한 배우들의 연기로 빛난다. 애당초 김수현 작가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압도적인 대사 분량과 지문의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연기할 것을 요구하는 작가 덕분에 연기 구멍이 없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 중에서도 청춘의 덫의 심은하는 무시무시하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할머니와 이모 아래에서 자라 청초하면서도 단단한 여자 윤희를 연기한 심은하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게 매달리다 결국 보내는 모습, 아이를 잃고 무너져 내리는 여자의 참혹한 심정, 악밖에 남지 않아 복수의 화신으로 분하는 절망을 놀랍도록 단단하게 연기해낸다.
오열하지 않고도 이글거리는 분노를 두 눈에 담고, 그 아름다운 얼굴로 차갑고도 단정하게 내뱉던 “당신, 부숴버릴 거야”는 얼마나 무서웠던가. 그해 SBS 연기대상이 심은하의 몫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젊은이의 양지’에 이어 다시 한 번 배신하는 남자 캐릭터를 택한 이종원은 이 작품으로 대한민국 배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잘생겼지만 야망으로 가득한 가난한 남자 주인공을 생각할 때 이종원 외에 떠오르는 얼굴이 없을 정도다.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던 이종원의 동우는, 여전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캐릭터이긴 하다.
그럼에도 다시 청춘의 덫을 보면 약혼녀 영주에게 “넌… 배고파본 적 없지”라고 말하는 동우의 눈빛과 목소리가 조금은 안쓰럽기도 하다. 2019년의 드라마에는 동우와 윤희 같은 관계는 오히려 찾아보기 어렵다.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하는 이 시대는 결혼도 사치스럽고, 결혼 전 자식을 낳는다는 건 더더욱 생각하지 않을 일이니 말이다.
반면 이종원의 대척점에 서 있는 영국을 연기한 전광렬은 (요즘 세대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여성들의 훈남으로 떠올랐다. 방탕한 재벌 2세지만 윤희를 사랑하는 모습만큼은 진실했던 영국. 자신을 버린 남자에게 보란 듯 결혼하고 싶은 윤희의 심경을 알아채고도 “날 이용해요. 이용당해주지”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여자가 기대고 싶은 어른 남자의 모습이었다고.
그리고 유호정. 김수현 작가 드라마에는 뽀글뽀글 진한 파마 스타일을 하고 떽떽거리는 말투를 사용하는 여자 캐릭터가 꼭 한 명씩 등장하는데, 청춘의 덫에선 유호정이 연기한 영주였다.
부잣집 딸이지만 첩의 자식이란 사실 때문에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있는 여자. 미치도록 동우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지만, 복수로 다가온 오빠의 여자 윤희의 존재를 깨닫고 결국 물러서는 영주는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캐릭터였다. 훗날 유호정은 ‘무릎팍도사’에서 후배 심은하가 얄밉도록 연기를 잘했다며 부러움을 토로했지만, 유호정의 영주 또한 얄밉도록 멋졌다.
20년이 흐른 지금은 다시 청춘의 덫을 리메이크할 수 있을까? 막장 드라마라면 몰라도, 남자의 배신과 여자의 복수라는 소재는 이 시대와 너무 동떨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결말은 여전히 놀랍다. 어찌 됐건 아이까지 낳았던 여자가 복수심으로 결혼하지만, 과거가 모두에게 낱낱이 밝혀져 조리돌림을 당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행복해지기까지 한다.
고작(!) 내장, 선지 팔던 주정뱅이의 딸이란 과거를 들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캐릭터(SKY캐슬)가 2019년의 인기 드라마에 등장하는 마당에, 1999년 윤희의 결말은 시대를 앞서가도 한참 앞서간 셈이니까.
김수현 작가의 시대가 저물고 그 아성을 이어받으려는 스타 작가들이 여럿 생겼지만, 빼어난 통찰로 시대를 앞서가는 작가의 역량을 느끼게 해주는 드라마는 여전히 드물다. ‘청춘의 덫’을 보면서 천천히 기다려 보련다. 21세기 대한민국을 놀라게 할 전복적인 드라마를.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최근에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유튜브에 있다는 걸 깨달은 후 신대륙을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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