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 화두가 된 시대. 지난 7월 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많은 직장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맞았다. 그들을 위해 퇴근 후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먹거리, 놀거리, 즐길거리를 소개한다.
을지로 3가는 미로다. 아지트다. 보물찾기다. 겉으로 보기엔 확연한 듯하지만 알고 보면 골목 곳곳에 ‘아는 사람’만 아는 ‘아는 장소’들이 따로 존재한다. 그런 장소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가 ‘을지로 3가를 좀 안다’ 혹은 ‘잘 모른다’로 말할 수 있는 척도다.
을지로 3가는 확실히 옛날 동네다. 낮에는 수많은 타일 가게와 각종 공구상, 인쇄소 등이 거리를 지배한다. 어쩐지 한물간 듯한, 2차 산업의 뒤를 받쳐주던 후미진 골목들은 어떻든 아직 생존하고 있다. 을지로 3가, 이 거리가 소위 ‘힙’하다는 정말 그 ‘힙지로’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거리에 보이는 사람들도 ‘산업현장의 역꾼’들뿐이다. 뭐지?
# 배우, 아트디렉터, 작가, 디자이너 등이 만든 ‘힙지로’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을지로 3가역에 내리면, 을지로 카페거리는 1, 2번 출구 쪽과 11, 12번 출구 쪽으로 나뉜다. 만선호프가 있고 타일 가게가 많은 1, 2번 출구 쪽에 ‘커피한약방’과 ‘녁’, ‘바 302호’ 같은 곳이 있다. 인쇄소가 몰려 있는 11, 12번 출구 쪽으로 ‘을지맥옥’, ‘을지로미팅룸’, ‘더문’, ‘희스토리 다락방’, ‘십분의 일’ 등이 흩어져 있다. 초행자라면 어디로 가도 헤맬 것이 뻔하므로 일단 어디로든 가보자.
2번 출구 쪽. 간판은 없지만 비교적 눈에 잘 띄는 거리에 서울비어프로젝트(SBP)가 있다. SBP의 정찬유 사장은 수제맥주유통을 하다가 펍을 차렸다. 현지에서도 희귀한, 레이블 독특한 수제맥주를 국내에 들여온다. 가게 오픈 한 달째, 신나게 ‘을지로 갬성’을 파악 중이다. “이곳에 다니는 젊은 친구들은 ‘을지로 미로놀이’를 즐기는 것 같아요. 여기서는 목이 좋지 않은 곳이 ‘목 좋은’ 곳이 되죠. 오래된 건물 안 창문 하나 없는 3, 4층 작은 사무실도 이곳에선 ‘힙’한 장소로 변신해요. 사람들이 가게들을 찾아내며 게임을 즐기듯 환호하더라구요.”
을지로 3가는 SK, 하나금융, 대신증권 등 대기업 빌딩들이 주변으로 즐비한 가운데 공구상가와 타일가게, 인쇄소가 꽉꽉 들어차 있다. 그 사이로 양미옥, 을지면옥, 조선옥, 이남장 같은 노포가 한 끼를 위로하고, 밤이면 노가리 골목이 직장인과 자영업자들의 노고를 달래주었다. 그 틈틈이 을지 힙스터들이 판치는 일명 ‘힙지로’가 존재한다. 2~3년 전부터 유행을 타기 시작한 거리는 최근 1년 새 달마다 업데이트되는 중이다.
배우, 아트디렉터,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인디밴드 음악가, 디자이너, 사진가. 을지로 3가의 비밀 같은 가게 사장들의 정체다. 어떤 가게는 사장만 열 명이다. 이들이 꾸리고 운영하는 술집이나 밥집이나 카페는 콘셉트도 분위기도 메뉴도 남다르다. 익선동만의, 해방촌만의, 서촌만의 분위기가 있듯 을지로 3가만의 후미지고 낡은 느낌. 여기서는 줄을 서는 가게지만 익선동이나 해방촌으로 가도 인기를 누릴 수 있을까 의심이 들 만큼 을지로 3가의 가게들은 이 거리의 분위기를 그대로 닮았다.
을지로 3가의 낮은 ‘커피한약방’ 등의 몇몇 카페로 대변된다. 5년여 전 터를 잡은 커피한약방은 정말 ‘터를 잡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의 자리에 들어앉아 있다. 한 사람 겨우 지나다닐 골목 틈에 세트장처럼 앉아 있는 적산가옥에 들어서면 근대문화유산 탐방이라도 온 것 같다. 나무계단과 자개장식, 고풍스런 테이블과 의자, 옛 다방에서나 볼 법한 어항, 거창한 오페라와 잔잔한 클래식이 번갈아 흐르는 고전적이고 묵직한 분위기에 슬며시 취한다. 그 안에 연극배우인 주인장이 직접 직화로 볶은 한약 같이 시꺼먼 커피가 있고 달달한 디저트와 함께 그곳을 즐기는 날아갈 듯 가벼운 젊음들이 가득 차 있다.
작가들의 작업실이면서 동시에 커피와 맥주를 파는 ‘호텔수선화’도 을지로 3가의 명물로 이름을 올린다. 원하는 잔에 베트남 연유 커피를 내어주는 카페 ‘잔’이나 케이크 파는 와인카페 ‘깊은못’도 들려본다. 연결을 모티브로 하는 파스타 맛집 ‘유에서유’와 늘 길게 줄을 늘어서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녁’도 찾기 쉽다.
# 골목 헤매며 ‘보물’ 찾는 재미
이 골목이 저 골목인 듯, 비슷한 골목을 방황하며 방향 잃고 헤매고 있는데 스멀스멀 저녁이 찾아온다. 밤이 일찍 찾아오는 한겨울이 잠깐 고맙다. 우리를 ‘술 시간’으로 빨리 데려다 놓기 때문에. 보일락 말락 손바닥만 한 이곳 특유의 술집 간판이나 그나마 어렴풋이 세어 나오는 ‘은밀한 작당들’의 불빛이라도 발견하려면 해가 기울어야 한다. 을지로 3가가 숨겨놓은 보물들은 밤에만 조금씩 눈에 띈다. 어둑해지지 않으면 영 찾아내기 힘들고 그마저도 산에서 호롱불 발견하듯 눈을 씻고 물어물어 찾아내야 한다. 보물찾기다.
사실 보물찾기에는 약간의 오기도 필요하다. 핫플레이스 찾는데 오기가 웬말이냐 하겠지만 을지로 3가의 술집들은 너무 꽁꽁 숨어 있어서 구글맵을 켜봐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간판도 없고 1층도 아닌 데다 겉에서도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골목을 헤매다 보면 ‘그곳’을 찾는 사람들끼리 알아보고 서로 ‘그곳’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기도 한다. 혹은 무작정 긴 줄이 늘어선 곳으로 가서 “여기는 어디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런데 을지로 3가에 놀러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걸 즐기는 듯한 분위기다. 동행에게 날도 추운데 초행이라 길을 못 찾아 미안하다고 하니 오히려 공구 상가 골목을 헤집고 다니며 이런 곳에 과연 술집이 있을까 찾아다니는 것이 재미있단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 들어온 기분이란다.
그렇게 찾아낸 술집이 또 신세계다. 겉에서만 보면 영화 ‘범죄도시’에나 나올 법한 모양새인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서면 빈티지하거나 아방가르드(실험적)하거나 레트로(복고)적인 인테리어 속에 왁자지껄, 사람들이 가득하다.
# 알아도 알아도 새로운 을지로 3가의 매력
을지로 3가에서는 술꾼이 아니라도 ‘3차’가 기본이다. 저녁 7시 가벼운 라운지 음악의 비트가 시끄럽지 않게 흥을 돋우는 11가지 수제맥줏집 ‘을지맥옥’, 저녁 9시 홍보부장인 오스트레일리안 셰퍼드가 안주를 함께 먹으며 정말로 술친구가 되어주는 아늑한 피자술집 ‘더문’, 밤 11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거나 은밀한 뒷거래가 일어날 것 같은 ‘바 302호’, 그리고 친구 빌라 꼭대기층 홈파티에라도 초대받은 듯한 ‘희스토리 다락방’까지.
을지로 3가에선 한자리에 오래 머물러 앉아있기란 영 아까운 일이다. 맥주 한두 잔 마신 후 계속 자리를 옮겨 새로운 곳으로 흡수되는 맛이 남다르다.
을지로 3가의 밤은 자신의 끼를 애써 감추고 돈벌이에 매진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밤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은 느낌이다. 밤이 왔다고 대놓고 드러내지도 않는다. 숨기듯이 조금씩, 베일로 가린 듯 살짝씩만, 긴가민가할 정도로 애매하게,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 본색을 영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힘들게 찾아갔을지언정 공간들은 거창하지 않다. 후미지고 낡은,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그런 공간들이다. 새것에 대한 질림, 헌 것에 대한 향수, 으리으리하고 번쩍번쩍한 것들 앞에서 사람들은 쉽게 구경꾼이 되곤 한다. 차마 가져볼 수 없을 것 같은 소외감을 벗어난 낡음은 때로 편안하고 그래서 근사하다.
오래된 거리답게 노포도 많다. 이남장, 평래옥, 양미옥, 오구반점, 안동장, 을지면옥 등 설렁탕과 냉면, 곱창, 짜장면, 순대국밥 등 한국인이 좋아하는 메뉴들을 파는 오래된 식당들이 아직은 건재하다. 겨울이라 노천의 인기는 시들하지만 을지OB베어와 만선호프가 딱 버티고 있는 노가리 골목도 여전하다.
하지만 2006년에 본격화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2 구역에 속한 을지면옥은 곧 철거될 예정이다. 양미옥, 안성집, 을지다방, 통일집 등도 무사하지 않을 거란다. 노가리 골목도 일부 철거된다. 개발 후 지하 7층~지상 20층의 건물이 들어설 거라는데 그럼 ‘을지로 갬성’은 어쩌나.
을지로 골목 일부의 철거 후의 미래를 보여주듯, 을지로 3가의 비밀 골목들과 조금 떨어진 세운상가 쪽 대림상가 야외 철계단을 오르면 2층에 또 다른 작은 신세계가 펼쳐진다. 말끔하게 단장한 상가에 줄 지어 깨끗하게 들어앉은 가게들. 이 거리는 한눈에, 한걸음에 쉽게 정복된다. 명물이 된 바로크풍의 호랑이카페와 막 생긴 수제맥줏집, 디저트 가게, 걸그룹 뮤직비디오에 나올 법한 핑크색 분식집, 고급 양장점 같은 옷가게와 액세서리집 등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5분도 안 돼 모든 가게의 탐색이 끝나고 취향껏 발을 들인다. 후미진 다른 을지로 3가 골목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허름한 공구상가들이 새로 지은 말끔한 건물에 들어오면서 이곳에도 산업용이 아닌 여가용 ‘신참’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
을지로 3가는 팜므파탈이다.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하고, 아는 것 같다가도 영 모르는 것 같고, 오늘밤이 지나면 사라져 내일은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줄 것 같다.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당분간 을지로 3가의 매력에 자발적으로 흠뻑 빠져 지낼 것 같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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