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새해 첫 등산은 태백산이다. 이름에서부터 전해오는 거대하고 웅장한 기운. 새해가 시작되는 1월, 영험한 기운이 흐른다는 태백산 꼭대기 천제단에서 소원을 빌면 어쩐지 뭐라도 이루어질 것만 같다. 사실 소원은 천제단에 비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에 꾹꾹 눌러 쓰는 손편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때로는 상징성도 필요한 법이다.
태백산으로 오르는 출발점은 크게 3곳으로 나뉜다. 당골광장, 백단사매표소, 유일사매표소 중 한 곳에서 시작해 또 다른 지점으로 내려와도 좋고, 오르고 내리는 길을 왕복해도 된다. 어느 코스를 택해도 왕복 4시간 정도의 거리다. 문수봉과 부쇠봉 등의 능선을 탄다면 5~6시간쯤 걸린다.
기자 일행은 유일사매표소 쪽으로 올라가 백단사매표소 방향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유일사를 지나 장군봉을 거쳐 천제단에 올랐다가 용정과 반재를 지나 백단사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편도 4km, 왕복 8km의 산행이지만 등산로가 단순해 어렵지 않다. 1월의 첫 주말이라 사람이 많다. 알록달록 등산복의 향연이 줄을 잇는 것을 보면 무언가를 결심하려거나 소망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게다.
백단사 쪽도 마찬가지지만 유일사매표소 쪽으로 오르는 길은 넓지만 경사가 꽤 급하다. 초반에 속력을 냈다가는 금세 숨이 턱까지 찬다. 처음부터 몸 풀 시간을 주지 않는다. 어느 정도 평탄한 숲길을 걷다가 중간부터 경사가 급해지는 산들과 달리 태백산은 처음부터 바짝 치고 올라간다. 평이하지만 숨을 할딱이게 하는 것이, 큰 어려움 없더라도 내내 만만치 않은 일상을 닮았다.
중간쯤까지는 쉴 틈 없는 오르막이다. 중간부 이상부터는 아늑한 숲길이 조금씩 펼쳐지고 입구부터 중턱까지는 잘 닦인 너른 길을 내리 올라간다. 길 폭도 임도만큼 넓다. 인생으로 치면 30대까지의 길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경사는 급하지만 비교적 쉽고 너른 길, 힘들어도 아직 지칠 틈 없는 치기 어린 길, 함께 걷는 사람이 많아 왁자한 길, 아직은 속도와 체력 차이가 그다지 나지 않는 길, 정상은 까마득하지만 어느 길로 갈지 아직 선택권이 주어진 길이다. 그래도 인생의 진정한 재미는 오롯한 숲과 묵직한 바위가 나타나고 조금씩 저 아래 세상도 보이는 중반부 이상의 길, 40대부터 다시 시작되는 그 길이 아닐까.
아기자기한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태백산 산행이 생각보다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굴곡지지 않은 길이라 발바닥이 편하다. 하지만 초반부터 계속되는 급경사가 내내 늘어져 있던 종아리 근육을 긴장시킨다. 급한 마음일랑 버리고 쉬엄쉬엄, 안 쓰던 다리 근육을 풀어가며 가야 한다. 산에 다녀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천천히만 간다면 어렵지 않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일 뿐이다. 눈이 온 지 한참 되었지만 오를수록 눈으로 덮인 산은 솜이불 뒤집어 쓴 양 포근하다.
소설가 김훈은 ‘자전거 여행’에서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된다”고 말했지만 몸과 길이 더 순전한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은 등산이 아닐까.
무념히 걷다 보면 몸과 길이 하나로 여겨진다. 김훈의 말처럼 내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내 몸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흘러 나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전망이 보이는 산 중턱에 이른다. 사실 ‘어느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몸으로, 땀으로 각인된다. 하지만 등산을 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피하고 싶지 않은 각인이다. 살아 있음마저 느끼는, 오히려 모두 끌어안고 싶은 각인이다.
태백산 중간 마루부터는 간간이 주목(朱木)을 만난다. 주목은 태백산의 대표적 수종이자 태백시의 시목이기도 하다. 멋스러운 주목이 있는 중턱 마루금은 태백산의 핫스팟이다. 사진을 찍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없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 그저 나무라고 하기엔 신령스러운 분위기마저 풍긴다.
조금 더 올라 장군봉까지 오르면 산행이 끝난다. 산마루를 사이에 두고 장군단과 천제단이 지척이다. 사람들은 이 탁 트인 산마루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는다. 김밥과 컵라면이 산해진미보다 맛있는 이유를 올라온 자들만이 만끽한다. 맛은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인 것임을 또 한 번 깨닫는다.
허기를 면하고 비로소 천제단에 오른다. 천제단은 돌로 켜켜이 반듯하게 쌓은 돌무더기 제단이다. 국가 중요 민속자료 제 228호로 매년 10월 3일 개천절에 천제를 지낸다. 매년 초에는 시산제를 올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새해 첫날도 아니건만 1월 첫 주의 천제단은 소란스럽다. 허나 그 소란함 속에서도 눈을 감고 두 손 모은 이들의 염원은 고요하다.
천제단에서 내려오며 비로소 눈을 멀리 둔다. 백두대간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저만치 함백산도 마주 보인다. 먼발치 언덕의 풍력발전기들과 하늘인지 바다인지 모를 푸른 안개도 만난다. 작은 해방감이 밀려온다. 갈비뼈가 아릿해질 만큼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다. 배꼽까지 내려가는 깊은 심호흡을 연거푸 해본다. 2018년의 묵은 공기를, 서울의 텁텁한 공기를 몸 밖으로 모두 말끔하게 빼내고, 2019년의 새롭고도 신선한 공기로 몸을 가득 채워본다.
오르는 길에 비해 영광의 시간은 길지 않다. 정상의 매서운 바람이 이제 그만 내려가라 등을 떠민다. 내려오는 길이 다소 헛헛하다면 마르지 않는 물이라 불리는 망경사 ‘용정’의 약수 한 사발을 들이켜도 좋다. 속이 얼얼할 정도로 찬 약수가 기어이 속 차리게 한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샘물이다. 망경사에서 반재로 하산하는 길은 자연 눈썰매장으로도 불린다. 경사가 급한 데다 걸리는 것이 없어 눈 온 날 포대자루를 타고 내려와도 될 만하다. 사람만 없다면 경사가 급해 봅슬레이처럼 속도가 날 것 같다.
백단사매표소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종아리에 잔뜩 힘이 붙는다. 급경사인 데다 눈길이라 미끄러지지 않으려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다시 두 시간은 꼬박 애써야 한다. 내려가면 포상이라도 주어야지 싶다. 그래봐야 뜨거운 물 목욕이 다겠지만 탄탄해진 근육들 자체가 스스로에게 주는 상이다.
누군가, 휴일의 포근하고 안락한 이불을 박차고 나와 왜 그리 힘들게 한겨울 칼바람 맞으며 산에 오르느냐고 묻는다면, 눈이 펑펑 내린 어느 날 태백산에 가보라고 일러주리라. 꼭 컵라면을 가지고.
이송이 기자
runaindia@bizhankook.com[핫클릭]
·
2019 새해맞이, 여행달인 15인이 살짝 공개하는 '나만의 그곳'
· [불금즉행]
깎이고 주저앉고 비틀어지고… 인생 닮은 한탄강 트래킹
· [퇴근야행]
뜨는 동네, 살아보고 싶은 동네, 서촌
· [퇴근야행]
"창고에서 만나" 성수동 수제화거리에서 이색카페 탐험
·
서귀포 '작가의 산책길'을 이중섭과 함께 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