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날 아프게 하지 마라.”
좌포청 종사관 황보윤(이서진)이 다친 채옥(하지원)에게 애끊는 심정을 절제하며 저 말을 담담하게 건넸을 때, 20대 초반의 나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뭐지? 뭔데 이렇게 떨리냐고!’ 2003년, 드라마 ‘다모’는 첫 회에 등장한 저 명대사를 시작으로 ‘다모폐인’을 양산했다. 이전부터 사극에 허구와 상상을 가미하는 퓨전 사극이 있었으나 ‘다모’를 본격적인 퓨전 사극의 시작으로 꼽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다모’는 이전의 사극과는 양상이 많이 달랐다.
먼저 주인공 설정부터가 남달랐다. 기존 사극이 왕을 정점으로 한 왕족들이나 실제 역사에 기록된 유명인을 대상으로 했다면, ‘다모’는 포도청에서 다모(茶母)로 일하는 천민인 관비(官婢)와 서자 출신의 종사관, 역적의 아들로 역모를 꿈꾸는 화적패 두령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다모’에도 왕과 사대부 양반들이 나오지만 그들은 이 작품에서 주변인일 뿐이다. 특히 다모인 채옥은 흔치 않은 여자 주인공인 데다가 남자 주인공들과 자웅을 겨룰 만큼 출중한 무술 실력을 지닌 인물로 등장해 ‘와호장룡’ 버금가는 액션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액션 여신’ 하지원의 시작을 알린 것이 바로 이 ‘다모’다.
1679년 환국으로 인해 홍문관 부제학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의 아들 장재무와 장재희가 탈출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어린 재희만 관군에게 잡혀 관비로 끌려가게 된다. 그가 바로 훗날의 채옥이다. 어린 채옥은 명문가의 서자인 어린 황보윤을 만난다.
똘똘한 사대부 여식에서 졸지에 역적의 자식으로 천민이 된 여자아이와 역시 똘똘하지만 어머니의 출신으로 신분의 한계에 사로잡힌 남자아이, 서로가 연민을 느끼기엔 충분하지 않은가.
둘은 성인이 될 때까지 함께 자라며 친구처럼, 오누이처럼 정을 쌓게 된다. 비록 한 명은 좌포청을 호령하는 종사관이요, 한 명은 차를 나르는 관비가 된지라 차마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아프냐. 나도 아프다” 같은 말로 그 절절한 심정을 대신하지만.
애매모호한 황보윤과 장채옥 사이에 등장하는 인물이 장성백(김민준)이다. 백성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화적패 두령인 그는 우연히 채옥과 부딪히며 여자임에도 강인하고 꿋꿋한 채옥에게 끌리게 된다. 채옥도 마찬가지인데, 수사를 위해 장성백의 산채에 위장 잠입하면서 백성과 동료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성백에게 끌리게 되는 것.
그러나 종사관을 도와 포도청에서 수사 임무를 맡은 채옥과 역모 세력의 일원인 장성백은 가는 길이 다르고, 결국엔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자고로 격정적 사랑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에서 한층 더 뜨거워지는 법.
특히 이 사랑에는 지고지순하지만 또한 이루어질 수 없어 속으로만 간직했던 채옥과 황보윤의 사랑도 끼어 있으니 더욱 어렵다. 2003년 방영 당시에도 시청자들은 ‘채옥-황보윤’ 대 ‘채옥-장성백’ 커플로 팬덤이 팽팽하게 나뉘어 응원했을 정도.
나는 소심하게 ‘채옥-장성백’ 커플을 지지했는데, 서브 남주를 좋아하는 병이 있는 데다 사극에서 흔치 않은 굵은 웨이브에 거칠고 불안하지만 내심 따스해 보이는 김민준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채옥과 성백이 실은 장재희와 장재무, 그러니까 친남매 사이라는 것!
드라마 특성상 애초부터 밝혀질 수도 있었던 이 출생의 비밀은 드라마 마지막 회, 모두가 죽음에 직면한 순간에서야 밝혀진다. 오호 통재라. 주인공 세 명이 모두 죽는 파격적인 새드엔딩 또한 ‘다모’가 기존 사극과 확연히 달랐던 점이다(그리고 하지원은 이듬해 ‘발리에서 생긴 일’에 출연하며 연속으로 비극적 삼각관계의 주인공이 된다).
‘다모’는 황보윤-채옥-장성백의 삼각관계 외에도 여러 사랑이 존재한다. 황보윤이 채옥을 마음에 품고 있음을 알면서도 투기하지 않을 것이니 함께 살자고 말하는 보기 드문 주체적인 반가 여식 난희(배영선)나 투박하고도 꾸준하게 채옥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안병택(신승환)의 사랑은 황보윤-채옥-장성백의 사랑처럼 데일 만큼 뜨거운 사랑은 아닐지라도 심금을 울린다.
무고에 휩싸여 자결한 신하를 애통해하는 임금, 수하와 동료를 위해 제 목숨 아끼지 않는 포도청 사람들, 생사를 함께하는 화적패 동료들의 감정도 남녀 간의 사랑 못지않게 진하고 뭉클하다.
‘CNTV’에서 재방 중인 ‘다모’를 보며 20대 초반의 격정적인 감성을 조심스레 꺼내 들춰본다. ‘내 심장을 뚫은 사랑’이라는 드라마 소개 카피가 지금 시대에는 너무 심각하고 격정적이라 촌스럽지만, 그 촌스러운 격정에 휩싸였던 그때의 감성이 그리운 것 같기도.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지금은 프리랜서를 핑계로 종일 드라마를 보느라 어깨에 담이 오는 백수 라이프를 즐기는 중.
정수진 드라마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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