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지금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새롭고 도전적인 일에 뛰어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넥슨을 세계에서 더욱 경쟁력 있는 회사로 만드는데 뒷받침이 되는 여러 방안을 놓고 숙고 중에 있습니다. 방안이 구체적으로 정돈되는 대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새해 정초부터 김정주 회장이 넥슨을 매각한다는 소식에 게임업계가 온통 들썩였다. 그리고 하루 만에 김 회장의 공식 입장이 나왔다. 아직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부정이 아닌 긍정에 좀 더 가까운 내용이 담겼다. 지난 25년간 우리나라 게임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갑자기 내민 사직서에 ‘도대체 왜?’라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최대 10조 원으로 추산되는 천문학적인 매각규모는 충분히 자극적이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알려진 매각 대상은 김정주 넥슨 회장과 가족 등 특수관계인이 가진 지주회사 NXC 지분 98.64%. NXC가 일본에 상장된 넥슨의 지분 47.98%를 소유하고 있고, 넥슨은 넥슨 코리아를 100% 소유하고 있다. 넥슨지티, 네오플 등 모든 계열사는 넥슨코리아가 거느리고 있는 구조다.
매각 소식이 전해지자 다양한 분석과 비판이 쏟아졌다. 게임 산업에 대한 과도한 규제에 지쳤다는 정부 비판 프레임부터, 진경준 전 검사장 주식 증여로 인한 수많은 검찰 소환과 재판으로 인해 환멸을 느낀 것 아니냐는 정치 프레임까지 나왔다.
또 워낙 매각 규모가 큰 까닭에 인수처로 중국 텐센트가 거론되면서 한국 게임산업이 중국에 넘어갈 것이라는 국부유출론부터 게임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손 털면 안 된다는 ‘엑시트(Exit, 출구전략을 통한 수익실현)’에 대한 비난이 불거졌다.
올해 우리나이로 쉰두 살이 된 김 회장이 정말 10조 원을 가지고 남은 생을 떵떵거리며 호화롭게 살까. 김 회장을 오랫동안 지켜본 많은 게임업계 사람들은 한결같이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입을 모은다.
# 게임은 더 이상 ‘재미’가 없다
넥슨은 여전히 성장세에 있다. 2017년 연매출 2조 4800억 원을 기록하고, 영업이익 역시 9125억 원에 달한다. 그간 발표된 분기 실적을 종합하면 2018년 역시 더욱 뛰어난 성적표를 받아들 것으로 기대된다. 매각 타이밍으로는 최적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달리 게임 산업 전반의 성장세는 갈수록 둔화되고 있다. 특히 넥슨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PC 온라인게임은 더욱 그렇다. PC 온라인게임의 인기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식었다. 그럼에도 넥슨이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중국 등 해외시장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김정주 회장은 게임개발자가 아니라 타고난 사업가이자 투자자다. 넥슨의 첫 작품인 ‘바람의나라’ 개발을 주도한 인물도 김 회장이 아니라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다. 김 회장은 사람을 보는 안목과 탁월한 투자 감각을 가지고 있다. 지난 20년간 넥슨을 먹여살린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마비노기, 던전앤파이터, 피파온라인3 등은 전부 인수합병 혹은 퍼블리싱을 통해 성공시켰다. 원론적으로 넥슨이 개발해서 흥행에 성공한 게임은 ‘바람의나라’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김 회장은 일찌감치 지난 2001년부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전문경영인을 두고, 마치 프로 스포츠팀 감독 선임하듯 필요에 맞게 교체해 왔다. 오죽 경영에 관여하지 않으면 회사에 방문한 김 회장을 경비원이 알아보지 못하고 차를 빼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을 정도다. 대신 최종적으로 빅딜을 성사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즉 김 회장의 넥슨 매각 행보 역시 경영자가 아니라 투자자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는 게 업계의 지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게임 콘텐츠 사업은 예전만큼 재미가 없어졌고, 넥슨은 매각에 있어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넥슨 매각 소식이 전해지면서 갑자기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적인 투자가로 알려져 있는 손정의 회장은 1998년 겅호온라인엔터테인먼트 설립을 시작으로, 2005년 그라비티, 2010년 징가, 2013년 ‘클래시오브클랜’으로 유명한 핀란드 게임사 ‘슈퍼셀’을 인수하는 등 그간 게임산업에 통큰 배팅을 감행해왔다. 그런 그가 현재는 모든 게임 관련 지분을 매각하고 게임 산업에 대한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김 회장은 손 회장과 수시로 연락하며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넥슨 관련 서적이나 인터뷰 등에서도 수차례 언급돼 온 사실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매 순간 업계가 깜짝 놀랄 빅딜을 성사시키며 회사를 성장시켜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 지분 팔고 ‘자유’를 얻고 싶다?
회사를 매각하지 않고도 투자를 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가령 넥슨코리아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만 해도 2017년 기준 무려 5000억 원에 이른다. 일본에 상장된 넥슨의 시가총액 역시 13조 원 규모로 평가된다. 회사 지분을 팔지 않고도 얼마든지 회사를 통해 투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왜 김 회장은 회사를 팔려할까.
김정주 회장이 NXC 지분을 전량 매각하게 되면 얻게 되는 것은 단순히 최대 10조 원으로 추산되는 천문학적인 돈만이 아니다. 넥슨은 현재 자산 5조원 이상 준대규모기업집단으로 지정돼 있다. 총수는 당연히 김 회장이다. 이에 따라 회사의 경영활동에 대한 법적 책임과 함께 본인은 물론 친인척의 지분 및 거래내역에 대한 공시 의무가 뒤따른다.
만약 김 회장이 가진 NXC 지분을 전부 매각하면 자연스럽게 총수 지정은 해제된다. 김 회장 입장에서는 투자 자금도 마련하고 투자를 위한 거추장스러운 제약도 사라지는 셈이다. 대기업 총수로서의 의무도 의무지만, 어떤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게임 산업 전체를 대표해서 받아온 비판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러한 행보는 마치 김 회장보다 더욱 은둔형 경영자로 유명한 이해진 전 네이버 이사회의장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둘은 과거 카이스트 기숙사 룸메이트로 시작해 줄곧 인연을 맺어온 사이다. 이 전 의장은 2017년 공정거래위원회에 KT나 포스코와 마찬가지로 총수 없는 대기업 지정을 요청했다. 이를 위해 의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 지분까지 팔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총수로 지정됐다.
이 과정을 지켜본 김 회장이 전량 매각을 고민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빠른 의사결정과 기밀이 생명인 신사업 투자에 있어 총수 일가의 공시 의무는 아무래도 족쇄가 될 수밖에 없다”며 “매년 넥슨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투자를 할 수 있었음에도 회사를 내놓은 이유일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 기회는 ‘유럽’에 있다
김정주 회장은 과연 다음 행보로 어디를 눈 여겨 봤을까. 유력하게 떠오르는 곳은 유럽이다. 구글이라는 공룡이 버티고 있는 미국,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내수시장을 움켜쥐고 있는 중국, 저물어가는 시장인 일본, 아직 만족할 만큼 성장하지 않은 동남아를 제외하면 결국 기회가 남은 곳은 유럽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해진 전 네이버 의장이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로서 유럽 시장 공략에 이미 뛰어든 점도 이러한 전망에 더욱 힘을 싣는다.
이에 따라 세간에는 김 회장이 NXC 지분 전량을 매물로 내놓은 것으로 전해졌지만,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는 반론도 나온다. 매각 협상에 따라 조건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지주회사인 NXC는 넥슨 이외에도 다른 회사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암호화폐 거래소인 코빗과 비트스탬프가 있다. 고급 유모차 브랜드 스토케, 놀이용품 기업 브릭링크 등도 있지만 매출 규모나 그간 성장세를 봤을 때 의미가 그리 크진 않다.
앞서의 게임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인수를 마무리한 유럽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인 비트스탬프를 특히 눈여겨봐야 한다”며 “불과 두 달 만에 지분을 전량 매각한다며 주관사까지 세울 정도라면 애당초 비트스탬프를 인수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벤처캐피탈 관계자 역시 “유럽 시장은 그간 우리 기업들이 여러 차례 직접 사업 진출을 모색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지역”이라며 “단순히 게임 등 인터넷 서비스 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 기술 기반 유망 기업에 투자하는 것은 충분히 기회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김정주 회장 입장 전문
김정주입니다.
저는 25년 전 넥슨을 시작한 이래,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우리 사회와 어려운 환경에서 묵묵히 일해 온 직원들이 함께 어우러진 좋은 토양 속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오늘까지 왔습니다.
저는 줄곧 회사의 성장을 위한 최선의 방안은 무엇인지, 저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지 늘 주변에 묻고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고민하며 왔습니다.
지금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새롭고 도전적인 일에 뛰어든다는 각오를 다지면서 넥슨을 세계에서 더욱 경쟁력 있는 회사로 만드는데 뒷받침이 되는 여러 방안을 놓고 숙고 중에 있습니다.
방안이 구체적으로 정돈되는 대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 사회로부터 받은 많은 혜택에 보답하는 길을 찾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껏 약속드린 사항들도 성실히 지켜 나가겠습니다.
봉성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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