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경기도 연천, 괜히 멀게 느껴진다.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람이라도 대개는 반도의 위쪽보다는 아래쪽이나 옆으로의 여행이 익숙하다. 하지만 요즘은 왠지 자꾸 위쪽으로의 여행이 궁금해진다. 언젠가는 반도를 위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 러시아와 중국까지 대륙 여행을 하게 되는 날을 꼽아보기도 한다.
연천은 군사분계선 인근 지역이라 서울에서 멀 것 같지만, 교통이 좋아져 요즘은 1시간 반이면 닿는다. 자유로를 타고 파주, 문산을 거쳐 37번 국도를 따라간다. 경기권이니 시외버스도 있고 한탄강역과 전곡역, 연천역 등에 서는 경원선 기차도 있다. 생각보다 가깝다.
2015년부터 경기도 연천군은 강원도 철원군, 경기도 포천시와 함께 한탄강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후보지이기도 하다. 한탄강 지질공원은 한탄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흔치 않은 강변 주상절리를 비롯해 각종 지형과 폭포 등 24개의 지질 명소를 품고 있다. 화산 폭발로 인해 생성된 현무암이 오랜 시간 각종 변형을 일으켜,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다. 50만 년 전부터 이어온 한반도 지질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한탄강은 임진강과 함께 군사분계선과 인접해 6·25 당시 고지전이 벌어지던 언덕들과도 멀지 않다. 실향민의 설움까지 더해져 ‘한탄을 품은 강’이라는 뜻으로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 한탄이라는 이름은 크다는 의미의 순우리말 한과 여울 탄(灘)이 만난, 큰 여울이라는 뜻이다. 그 큰 여울 속에 세월의 모든 아픔과 잔상을 품어 안았다. 그 쪼개지고 미어진 아픔이 어쩌면 고스란히 한탄강을 둘러싼 주상절리와 켜켜이 쌓인 지질의 모양으로 나타나는지도 모르겠다.
50만 년 전 북한의 오리산 등에서 10여 차례나 분출된 용암이 한탄강의 물길을 따라 철원과 포천, 연천을 거쳐 파주까지 110km를 흘러내리며 한탄강의 장관을 만들어냈다. 용암이 수축하며 기둥 형태로 쪼개지고 굳어져 생긴 주상절리는 비바람과 물에 의해 또다시 깎이고 쌓이며 한탄강의 수직벽에 화석처럼 박혀 있다.
땅은 화산 폭발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맞아 시간과 함께 견고하면서도 때로 유연한 지질을 만들었다. 땅은 지금도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면서 변화하고 있다. 작은 폭포와 주상절리, 판절리, 하식동굴, 현무암 협곡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탄강 걷기는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지만 강변의 한가함만은 실컷 누릴 수 있다.
연천의 여러 걷기 길 중에서도 한탄강 주상절리길이 강 따라 걷는 대표적인 강변 트래킹 코스다. 아우라지 베개용암에서 시작해 좌상바위를 거치고 한탄강 관광지를 만났다가 은대리성을 지나 도감포까지 가는 27.9km의 트레일이다. 쉼 없이 걸으면 9시간 정도 걸리지만 어느 한 구간을 선택해 1~2시간 혹은 2~3시간 걸어보는 것도 좋다. 한탄강역과 전곡역을 거쳐가게 되니 기차를 타고 가다가 이곳에서 내려 임진강과 한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걸어봐도 좋다.
겨울엔 좀 춥더라도 상큼한 공기에 ‘쨍’ 하고 머리가 맑게 깨이고,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온갖 미세먼지까지 씻어내주는 느낌마저 든다. 머리 복잡하고 가슴 답답한 이들에게 제격이다.
한참 한탄강을 따르며 걷다가 임진강과 만나는 두물머리를 지나면서는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들어내는 장관에 이곳이 어디인지 잠시 헛갈릴지도 모른다. 날이 흐리면 물빛은 서늘하게 반짝이며 아련하게 흐르고, 날이 맑으면 쪽빛이 감도는 청정한 물빛에 마음이 개운해진다.
걷고 쉬면서 무시로 펼쳐진 한탄강의 적벽을 보다 보면 문득 인생을 배우고 위로를 받을지도 모른다. 쌓이고 눌리고 비틀어지고 깎이고 부서지고 다시 쌓이고 없어지는 것이 인간의 삶과 다르지 않아서다. 숱한 세월 이어졌을 지각 변동을 상상하다 보면 무엇이 좋은 일이고 무엇이 좋지 않은 일인지의 분간조차 희미해진다. 땅이 주는 지혜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트래킹 코스의 시작점에 있는 재인폭포도 들려보길 권한다. 주상절리를 배경으로 18m 높이로 떨어지는 재인폭포는 어느 외딴 곳의 신성한 장소처럼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다. 스카이워크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선녀가 나오거나 신화가 탄생할 것처럼 둥그렇게 움푹 들어가 있어 신비함을 더한다.
폭포수가 떨어지며 절벽의 자갈을 털어내고 자갈은 물속으로 들어가 굴려지며 안쪽의 땅을 팬다. 파인 땅을 견디지 못하고 절벽의 지반이 무너져 내리면 그 위에 다시 폭포가 흐르며 절벽은 서서히 뒤로 물러난다. 무너지고 깨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자연계의 순리라고 말하는 듯하다.
연천에는 한탄강 주상절리길 말고도 걷기 좋은 트래킹 코스가 여럿이다. 두루미테마파크에서 시작해 개안마루와 옥녀봉을 거려 삼곶리전망대로 가는 7.7km의 연강나룻길은 임진강을 따라 3~4시간 걷기 좋은 코스다. 또 연천읍에서 전곡읍까지 차탄천과 용암 협곡을 따라 걷는 차탄천에움길도 있다. 9.9km, 4시간 정도 걷는 길로 이 코스에서도 주상절리를 감상하기 좋다.
이 외에도 비무장지대를 따라 논밭길, 강둑길, 오솔길 등 마을길을 포함하는 평화누리길 10, 11, 12 코스가 연천을 통과한다. 10코스는 16km의 고랑포길, 11코스는 18km의 임진적벽길, 12코스는 28km의 통일이음길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찍었다는 뉴질랜드의 미니어처와 같은 협곡을 맛보며 머리끝까지 쨍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한겨울 한탄강 트래킹이 답이다. 한탄강댐 물문화관에서 연천군 국가지질공원 홍보관을 겸하고 있으니 지질여행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면 이곳을 시작점으로 삼아도 좋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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