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환자 분들 중에는 심지어 동물 사료를 드시는 분도 있어요. 동물 사료를 파는 회사가 동물용으로 만든 CBD(칸나비디올·Cannabidiol) 오일이 있는데, 환자 가족들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걸 사서 환자에게 먹입니다.”
지난 17일 서울 역삼동 사무실에서 만난 강성석 의료용 대마 합법화 운동본부 대표의 말이다. 발작과 뇌질환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CBD 오일은 대마의 꽃과 잎에서 추출되는 성분.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씨앗·뿌리·줄기 이외의 대마초 부위를 사용하거나 성분을 추출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이다. 국내에서 CBD 오일은 아예 판매되지 않을뿐더러 해외에서 수입하는 것도 금지됐다. 그래서 환자들이 그 대용품으로 사료로 등록 허가된 동물용 CBD 오일을 산다는 게 강 대표의 설명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햄프시드오일’은 대마의 씨앗으로 만든 제품으로, CBD 오일과는 다른 제품이다.
우리나라도 지난달부터 의료용 대마 합법화가 시작됐다. 11월 23일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이 대표 발의한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재석의원 92.76%의 찬성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 개정안에 따르면 의료 목적으로 대마 또는 대마초 종자의 껍질을 흡연하거나 섭취하는 경우는 의사나 한의사의 처방만 있으면 가능하다. 법안만 놓고 본다면 의료용 대마를 합법화한 미국과 캐나다와 다를 게 없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법안이 통과됐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지금처럼 동물병원에 가서 동물용 CBD 오일을 구하거나, 해외에서 대마 성분의 의약품을 직접 구매하는 사례가 줄지 않을 것이라고도 한다. 법만 통과됐을 뿐 현실적으로 나아진 것은 별로 없다는 주장이다.
# 법 바뀌었어도 환자들은 냉담
법이 바뀌었는데도 뇌전증과 파킨슨병 등 대마 성분 의약품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의 반응이 냉담한 이유는 뭘까. 이들은 지난 11월 29일 식약처가 내놓은 보도자료와 12월 14일 발표된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개정안’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2019년 상반기부터 CBD 성분의 에피디올렉스(Epidiolex) 등 해외 대마 성분 의약품 4종을 수입하겠다는 내용이다.
다만 식약처는 대마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해외에서 의약품으로 허가를 받지 않은 식품, 대마 오일, 대마 추출물 등은 지금과 같이 수입과 사용이 금지된다고 밝혔다. 게다가 허용된 대마 성분 의약품 4종마저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에 위치한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에 신청해서 심사를 거친 후 공급받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는 식약처에서 위탁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비영리 법인으로, 전국에 하나뿐인 ‘특수 약국’이다.
의료용 대마 합법화 운동본부와 환자들은 모법에 비해 시행령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며 반발하는 모양새다. 강성석 대표는 “의료 목적으로 대마를 이용하도록 최상위법을 다 바꿔놨는데 정부가 발표한 시행규칙이나 시행령이 너무 미달된다”며 “모법의 취지에 어긋나는 시행령을 만드는 것은 정부가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파킨슨병 환자도 인터넷 카페에 “대마 성분 의약품 수입이 가능해졌으나 파킨슨 환자들에게는 무용지물”이라며 “외국 제약회사의 의약품 네 종 이외에는 사실상 모두 막겠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의 의료용 대마 합법화와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했다.
의료용 대마 합법화 운동본부와 환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들이 주장하는 시행령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개정법에서 의료 목적의 대마초 사용과 수입이 가능하다고 했음에도 정작 시행령은 의료용 대마 이용 범위를 의약품 4종으로만 축소했다는 것이다. 강 대표는 “이번에 수입하기로 한 의약품인 에피디올렉스 성분은 CBD인데, 사실 이것과 CBD 오일은 크게 차이가 없다”며 “왜 CBD 오일은 허가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현재 의료용 대마를 합법화한 일본과 중국에서는 ‘라쿠텐’과 ‘알리바바’ 등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CBD 오일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미국 등 다수 국가들이 CBD 오일을 건강기능보조식품으로 분류해 판매한다. 뇌전증을 앓는 자녀를 둔 의사 황주연 씨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CBD를 관리해야 할 물질이 아니라고 했고,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도 CBD는 기타 소화제나 두통약과 비슷하게 취급하면 된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의료용 대마를 공급받기까지 절차가 까다롭다는 점도 문제로 꼽힌다. 의약품을 공급받기 위해 작성해야 하는 자료는 최소 12가지로 추정된다. 황 의사는 “식약처에 필요한 서류를 물어봤더니 3월에 구체적인 안이 나오니 그때 다시 연락을 달라고 하더라”라며 “치료 목적으로 대마 성분을 모두 허용한 것도 아니고 제품 네 개만 허가한 거면 아무한테나 처방해주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깝다”고 밝혔다.
이번 시행령이 부유층을 위한 정책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국희귀의약품센터에서 공급되는 약에는 보험 적용이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약품은 많고 우리나라 보험 재정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환자 가족이 비보험 약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도 만만찮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영국 제약회사 GW파마슈티컬즈가 판매하는 에피디올렉스의 연간 치료비용은 3만 2500달러(3650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에피디올렉스는 식약처가 공급하겠다고 밝힌 4종의 의약품 중 하나다.
# 환자 기대 못 미치는 시행령 나온 배경은?
이처럼 환자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시행령이 나온 배경은 뭘까? 환자들은 정부가 아직까지 대마를 위험하다고만 인식해 대마 성분을 면밀히 살펴볼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강 대표는 “식약처는 대마 오남용 우려를 지나치게 경계한다”며 “약국에서 처방받는 약 중에 대마보다 수십 배 위험한 약도 있다. 대표적인 게 불안장애 치료제 자낙스”라고 지적했다.
보건복지부가 건강보험관리공단 등과 협조를 통해 의료용 대마가 필요한 환자 인원과 약제비 등을 미리 파악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강 대표는 “뇌전증이나 파킨슨이 부자만 걸리는 병도 아니지 않나”며 “정부가 환자 분들과 다 모여 공청회도 하겠다고 했는데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식약처 관계자는 “그런 부분은 대마 합법화 단체의 일방적인 주장이며, 대마가 환각성이 있다는 건 다 알려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마약이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FDA에서 승인받은 약품 중에 자가 치료용에 한해서만 풀어준다고 법 개정이 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동물용 CBD 오일을 섭취하는 사례를 이야기하자 “처음 듣는 얘기”라며 “그쪽에서 대마를 합법화하기 위해 주장하는 것 같다. 이해가 안 된다. 어떤 부모가 동물용 오일을 먹이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절차가 복잡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희귀의약품센터에서 1~2주 안에는 공급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 식약처는 내년 1월 23일까지 개정안에 대한 의견을 받는다. 의료용 대마 합법화 운동본부는 의료계와 연합해 이번 주 내로 의견을 제출할 계획이다.
김명선 기자
line23@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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