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같은 일을 하는데 노동 시간이 다르면 누구나 부당하다고 느낄 것이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회사에 도착하면 일이 시작된다. 그러나 많은 여성은 출근 전 이미 집에서부터 노동이 시작된다.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 입어야 하는 이른바 ‘꾸밈 노동’ 때문이다. 꾸밈 노동은 화장, 패션, 용모 관리 등 여성에게만 요구되는 사회적 치장을 뜻하는 말이다.
얼마 전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는 명품 업체 샤넬코리아 직원 334명이 사측에 꾸밈 노동 수당을 지급하라며 청구 소송을 냈다. 이들은 꾸밈 노동도 회사 이미지 제고를 위한 노동에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근로기준법에 따른 정규 근로 시간은 9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였지만, 직원들은 적어도 9시까지는 조기 출근해야 했다는 것. 샤넬코리아 측에서 직원들에게 9시 30분까지 화장, 복장, 헤어 메이크업을 끝내라고 요구한 게 발단이었다.
꾸밈 노동을 둘러싸고는 여전히 찬반 논란이 분분하다. 일부에서는 “돈을 받고 일하는 건데 (꾸밈 노동이) 뭐가 문제냐”며 “남성들도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지 않느냐”는 말도 한다. 그러나 같은 일을 하는데도 유독 여성에게만 엄격하게 미(美)의 잣대를 들이미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 안전 책임지는 승무원이 왜 치마를 입어야 할까
꾸밈 노동이 가장 크게 요구되는 직종은 서비스 직종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직업이 바로 항공사 승무원이다. 지난 10월 국정감사에 출석한 유은정 대한항공 승무원은 “몸매가 드러날 정도로 유니폼이 꽉 끼고, 승객의 짐을 올리다 보면 블라우스가 올라가 허릿살이 보이는 경우가 많다”며 불편을 호소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이렇다 할 개선책은 나오지 않았다. 한 승무원학원 관계자도 “유니폼은 바뀌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기자와 인터뷰한 세 명의 저비용항공사 승무원 모두 복장이 불편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 아무개 씨는 “유니폼은 늘 불편하다”며 “옷이 너무 꽉 조이기 때문에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 아무개 씨는 “(우리 항공사는) 복장 규정이 자유로운 편이라 제공되는 여러 유니폼 가운데 원하는 것을 착용할 수 있다”면서도 “그러나 유니폼 재질이 생각보다 얇아서 속옷 라인이 비쳐서 불편하다”고 말했다. 오 아무개 씨 또한 “겨울에도 살색 스타킹만 신어야 한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오 씨는 “승무원은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안전요원인데 왜 유니폼이 치마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편한 바지 유니폼을 입는다고 해서 꾸밈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승무원 김 아무개 씨는 “승객들이 대놓고 ‘와 저 승무원 너무 예쁘다’는 식으로 얘기한다”며 “외모에 대한 압박감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고 털어놨다.
전문직인 간호사도 꾸밈 노동에 시달린다는 지적이 많다. 최근 강원도 내 한 병원의 노동조합 게시판에는 ‘머리망을 하면 견인성 탈모 등 불편한 점도 많다. 왜 간호사들만 머리망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 병원 간호사는 “여성, 그 중에서도 연차가 낮은 간호사들에게만 복장 규정이 엄격하다”며 “단정하게 묶으면 되지 머리망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탈모도 생기고 두피도 따갑다”고 지적했다.
# KB국민은행·KDB산업은행 내년부터 유니폼 자율화
은행권에서는 작은 변화가 감지된다. 최근 시중은행 두 곳에서 유니폼을 폐지하거나 자율화하겠다고 밝힌 것. 지난 1일 KB국민은행은 내년 5월부터 유니폼을 완전히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수평적인 기업문화를 확립하고 유연한 근무를 위해 유니폼을 폐지하게 됐다”며 “내년 4월까지는 유니폼과 사복 중 자유롭게 선택해 입게 할 예정인데 사복을 입겠다는 직원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KDB산업은행도 내년 초부터 유니폼을 자율화한다고 밝혔다. KDB산업은행 관계자는 “연차가 낮은 여직원들에게 유니폼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노조에서 여직원 유니폼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1월부터 시행될 거라 국민은행보다 먼저 자율화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KB국민은행과 KDB산업은행 관계자들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꾸밈 노동 때문에 유니폼을 폐지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다만 낮은 연차의 여직원들에게 강제로 유니폼을 착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기에, 은행이 이 흐름을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은행을 제외한 나머지 은행에서는 아직 유니폼 폐지가 논의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종각역과 시청역 부근 은행을 돌아다녀 보니 여전히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은 채 업무를 하는 창구 여직원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대부분 여직원들이 유니폼을 편하게 생각한다. 유니폼을 입으면 오히려 (외모에) 신경을 덜 쓸 수 있다”며 “아직 유니폼 자율화는 검토하지 않았다.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 자유로운 언론사는 좀 다를까
손님을 응대해야 하는 서비스 직종은 고객에게 친절하고 밝은 인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하지만 다른 직종 역시 꾸밈 노동에서 예외가 아니다. 외모 평가에서 자유로울 것 같은 언론사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현직 기자인 조 아무개 씨는 “직장 동료들끼리 이야기할 때 여직원들 옷에 대해서 평가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남자들이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며 “한번은 후줄근한 롱코트를 입고 출근했는데 ‘중학생같이 그게 뭐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얼마 전 언론사 인턴 과정을 끝낸 한 취업 준비생 또한 “다른 부서 인턴 언니가 화장을 안 하고 다녔는데 어떤 선배가 진담 반 농담 반으로 ‘화장 좀 하고 다녀라’라고 했다”며 “그 얘기를 내가 직접 들었다면 솔직히 기죽을 것 같다. 내 얼굴이 별로여서 그런가, 여자인 나한테만 왜 뭐라 그러지,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 않을까”라고 털어놨다.
# “화장 안 하면 예의 없다?” 고정관념부터 바꿔야
한국여성민우회가 작년 6월~7월 4788건의 성차별 사례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일터 영역에서의 성차별 1위는 ‘외모지적, 복장규정’이었다. 김희영 민우회 성평등복지 팀장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특히 ‘여자가 화장을 안 하면 예의 없고 기본자세가 안 됐다’는 고정관념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실제 일터의 규정들을 만들어냈다”며 “사회·정치적 민주주의에 이해가 높아진 것과 비교해 아직도 일상적 영역에서의 성차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결국 꾸밈 노동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런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머리를 짧게 자른 여성 유튜버 이 아무개 씨는 “댓글에 ‘이분 남자예요, 여자예요?’ ‘생긴 건 남자인데 목소리는 여자네요’ 같은 댓글이 아직 많이 달린다”며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예뻐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이수연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들은 항상 외모 평가의 대상이 되어왔다”며 “제도적인 것보다는 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여성과 남성이 다 같이 노력을 해야 할 텐데 쉽지는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김명선 기자
line23@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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