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송혜교는 예쁘다. 이 무슨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냐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송혜교가 예쁘다는 말에 공식적으로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당장 나만 해도 송혜교보다는 고양이과의 미녀를 좋아하지만 송혜교가 예쁘지 않다고 말하기엔 미적거리게 된다. 개과든 고양이과든, 키가 크든 작든, 내 취향이든 아니든 간에 세상에는 절대불변의 진리 같은 게 있는 법. 송혜교가 예쁘다는 말도 그와 비슷하다. 한창 화제인 드라마 ‘남자친구’가 예쁜 송혜교와 귀여운 박보검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해 연일 화제인 걸 보라.
그렇다면 송혜교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이 글은 본격 송혜교 찬양문이 절대 아닙니다). ‘태양의 후예’라고, ‘그 겨울, 바람이 분다’라고,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고, ‘풀하우스’와 ‘올인’ 때라고 목청 드높여 주장할 사람들이 있겠다. 물론 송혜교는 언제나 예뻤다. 하지만 그 예쁨이 가장 극적으로 소요된 작품을 꼽자면 역시 ‘가을동화’다. 송혜교의 드라마 중 유일하게 비극으로 끝난 작품이자 지금의 송혜교를 있게 한 출세작 말이다.
사이좋은 남매가 있다. 공부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려 ‘학교의 왕자님’인 윤준서(아역 최우혁, 성인 송승헌)와 해맑고 어여쁜 여동생 윤은서(아역 문근영, 성인 송혜교). 현실 남매들은 눈만 마주치면 서로 싸우거나 혹은 소 닭 보듯 하는 것이 관례이건만, 이 남매는 지나치게 사이가 좋다.
부잣집에서 왕자, 공주처럼 자란 이들을 시기하는 소녀가 있으니 시장 골목에서 국밥집을 하는 억센 엄마와 깡패로 소문난 오빠를 둔 최신애(아역 이애정, 성인 한채영)다. 은서와 같은 반인 신애는 가난한 환경에서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악착같지만, 자신에게 없는 것을 거저 누리면서 자신보다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반장을 도맡는 은서가 미워 죽을 것 같다.
그런데 은서와 신애가 서로 바뀌었단다. 드라마 첫 장면에서 태어난 아이를 보러 온 준서 아빠와 준서를 비추는데, 어린 준서가 실수로 은서와 신애의 이름표를 떨어뜨리며 생긴 사고다. 그리하여 교양 있는 부잣집 딸과 교양이라곤 찾을 수 없는 가난한 집 딸의 처지가 바뀌어 윤은서가 최은서가 되고, 최신애가 윤신애가 된다. 사이좋던 남매가 드라마틱하게 헤어지니, 비극이 시작된다.
세월이 흘러 미국으로 떠났던 준서가 성인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온다. 미술을 전공해 대학에 출강하는 이 미남 청년은 걸맞은 약혼녀도 있지만 여전히 어릴 적 동생 은서를 그리워한다.
한편 어여쁘게 성장한 은서는 강원도 어느 고급 호텔의 객실 메이드가 되어 있다. 가난한 환경으로 대학에 가진 못했지만 특유의 밝고 당찬 성격, 그리고 미모로 호텔의 소유주인 재벌그룹 망나니 아들 한태석(원빈)의 구애를 받는 중이다. 자, 여느 멜로드라마라면 은서와 태석의 신데렐라 스토리로 흘러가겠지만 문제는 14년간 오빠였지만 사실 생판 남이라 헤어지는 바람에 10년 가까이 그리워했던 오빠 준서가 나타난 데 있다.
그리웠던 오빠와 여동생은 선남선녀가 되어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둘을 남매로 키웠던 준서의 부모나 준서의 약혼녀, 은서를 좋아하는 태석 등 주변 사람들이 놀라고 반대하는 것은 당연지사.
주변의 반대와 준서 약혼녀의 자살 시도까지 이어지며 둘은 애달프게 헤어질 뻔하지만, 여기에 ‘두둥’, 불치병이 등장한다. 은서가 친부처럼 혈액암(백혈병)을 앓는 거다. 그렇게 ‘가을동화’는 한국 드라마 삼요소로 꼽히는 출생의 비밀, 불치병, 부잣집 남자와 가난한 여자 사이를 오가는 삼각(사각, 오각까지 이어진다)관계를 때려 넣은 전형적인 최루성 멜로드라마로 등극한다.
문제는 이 최루성 멜로드라마를 거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지금 보면 어이가 없을 만큼 빤한 설정과 과한 우연과 몰입으로 점철돼 있지만, 잘생긴 송승헌과 예쁜 송혜교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들의 미모와 대비되어 한층 비극적이다(이 글은 본격 외모지상주의 찬양문이 절대 아닙니다).
여기에 재벌집의 혼외자라는 태생의 상처로 망나니처럼 구는 태석의 은서를 향한 집착적인 사랑이 더해지며 멜로드라마 팬들의 가슴은 무너져 내린다. 근 20년이 지난 지금도 쓰이는 ‘불세출의 자본주의 명대사’도 서브 남주인 태석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랑? 웃기지 마. 이젠 돈으로 사겠어. 돈으로 사면 될 거 아냐. 얼마면 될까? 얼마면 되겠냐.”
드라마 내내 미간을 찌푸린 채 상처 받은 강아지 눈망울을 하던 태석의 거친 질문에, 자신이 암이란 걸 알게 된 은서가 처연하게 눈물 글썽이며 하는 대답도 압권이다.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나, 돈 필요해요.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나, 얼마에 팔면 되죠?”
드라마 속 인물들은 누구 하나 큰 악역이 없고, 심지어 저마다 켜켜이 상처를 안고 있다(못되게 구는 신애, 거짓말로 준서를 붙드는 약혼녀 유미도 알고 보면 불쌍한 인물들).
그러나 18년이 지난 지금 다시 ‘가을동화’를 보면서 눈길이 가는 인물은 신애를 키웠던 은서의 친엄마(김해숙)다. 은서를 잃고 몇 년간 병을 앓을 만큼 괴로워했던 준서 엄마(선우은숙)의 모정도 서글프지만, 준서 엄마는 은서를 다시 만나면서 자신의 그리움을 가감없이 드러낼 수 있는 입장이다.
반면 은서 친엄마는 가난하기에 키운 딸 신애를 잡을 수도 없었고, 죽어가는 친딸의 손도 준서 엄마가 있을 땐 차마 잡지 못한다. 부잣집에서 자란 딸을 가난하여 공부도 제대로 못 시켰는데, 심지어 유전으로 병까지 물려줬다는 죄책감과 절망감. 은서 친엄마를 연기한 김해숙의 눈빛과 행동 하나하나가 새삼 세상사에 찌든 내 눈물을 쥐어짜더라고.
다시 태어나면 한 번 뿌리 내리면 움직이지 않는 나무로 태어나겠다던 은서의 대사, 시도 때도 없이 울려 퍼지던 애절한 ‘로망스’의 기타 선율, 그리고 세상을 떠난 은서를 따라 자신 또한 달려드는 화물차를 피하지 않고 죽음을 맞는 준서를 비추는 극적인 엔딩까지. 시종일관 아련하고 슬픈 ‘가을동화’. 가을은 벌써 지나갔지만, 여전히 예쁜 송혜교, 작품으로 얼굴 내민 지 오래된 원빈을 추억하기엔 이보다 좋은 작품이 없다.
필자 정수진은? 영화를 좋아해 영화잡지 ‘무비위크’에서 일했고, 여행이 즐거워 여행잡지 ‘KTX매거진’을 다녔지만 변함없는 애정의 대상은 드라마였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홈페이지에서 인물 소개 읽는 것이 취미이며, 마감 때마다 옛날 드라마에 꽂히는 바람에 망하는 마감 인생을 12년간 보냈다. 지금은 프리랜서를 핑계로 종일 드라마를 보느라 어깨에 담이 오는 백수 라이프를 즐기는 중.
정수진 드라마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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