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 화두가 된 시대. 지난 7월 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많은 직장인이 ‘저녁이 있는 삶’을 맞았다. 그들을 위해 퇴근 후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먹거리, 놀거리, 즐길거리를 소개한다.
기자는 서촌에 산 지 2년이 다 되어간다. 서촌에서는 어디를 가보고 무엇을 꼭 먹어보고 어떤 식으로 이동해야 효율적인지보다는 서촌이라는 마을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마땅히 만끽해도 좋을 여러 감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2년간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서촌을 탐방한 사람으로서 처음 서촌에 방문하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소소한 이야기다. 아무것도 아닌, 그러나 이 시대에는 어쩐지 특별한 풍경이 되어버린 서촌의 정취는 부유하는 현대인의 마음에 ‘정착’의 안정감을 준다. 아파트촌에서는 차마 상상할 수 없는 풍경, ‘오래된 서촌’이다.
좋은 동네에 살면 삶이 윤택해진다. 좋은 동네란 편의시설과 교통이 좋은 동네만은 아니다. 서촌에서는 동네의 흔한 집 옥상, 혹은 오르막길 한편에서 인왕산과 북악산이 바라다보이고 멀리 청와대 지붕도 아른거른다. 종로09번 마을버스 종점인 동네 끄트머리엔 느닷없이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수성계곡이 펼쳐지고, 인왕산으로 가는 등산로나 부암동으로 가는 숲속 산책로가 이어진다.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길에서 수시로 목격하는 작은 상점들의 예쁜 장식들과 카페에서 풍겨오는 할로겐 조명에 문득 마음 따뜻해진다.
서촌에 으리으리한 건 거의 없다. 소품숍도 레스토랑도 카페도 술집도 빵집도 서점도 집들도 모두 작고 소박하고 정겹다. 청와대 인근이라 높은 빌딩이 없고 오래된 아파트는 5층이 최고층이다.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해 서촌으로 불린 이곳은 양반가와 세도가들이 담 높고 너른 한옥을 짓고 살던 북촌과는 태생부터 다른 것처럼 아늑하게 사람을 안아준다. 입이 떡 벌어지도록 위엄 있게 정렬된 북촌의 한옥과 달리 서촌의 한옥들은 평지에 일반 가옥들과 섞여 아담하게 들어앉아 있다. 물론 그러면 안 되겠지만 장난으로 초인종을 누르고 무언가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 한들 용인될 것만 같은 느낌, 그리 어렵지 않은 이웃이 살 것만 같다.
그러니까 서촌은 그냥 핫한 거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오래된 마을이다. 오래전부터 마을 안에 자연스럽게 하나 둘 생긴 가게들과 새롭게 생긴 예쁜 상점들이 어우러져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아기자기한 풍경을 만들었다. 미용실과 동네 주민들의 진짜 밥집, 철물점과 전파사, 수선집과 한의원 등이 세련된 카페나 레스토랑들과 어우러진다. 인위적인 예쁨이 아니라 때가 묻고 그리움이 깃든 다소 모자라고 빈틈 많은 아름다움이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서촌은 그걸 알아본 외지인의 발길로 붐빈다. 20~30대 데이트족들부터 엄마와 딸 혹은 초등생 아이와 부모, 중년 부부, 유모차를 탄 아기와 할머니를 대동한 가족까지, 유명세를 탄 그 어느 거리보다 연령층이 다채롭다. 여기에 인왕산이나 북악산 걷기를 마친 산책자들과 출사 나온 사진동호회 멤버들과 드로잉 하는 아마추어 예술가들까지 가세한다. 너무 세련되고 힙해서 눈이 사방으로 돌아가고 어른들이 걷기에 부담스러운 거리가 전혀 아니다. 누구라도 이 거리에서는 동네 마실 나온 친근한 느낌을 갖는다.
서촌은 주말에도 관광객으로만 붐비지 않는다. 낮엔 오랜 세월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 통인시장 앞 정자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장기를 둔다. 정자를 둘러싸고 들어앉은 오래된 통닭집과 빵집, 청과상과 목욕탕이 주는 편안한 느낌이 동네를 비로소 동네답게 한다. 그 곁에는 생긴 지 오래지 않은 낮술집과 핫도그집도 어색하지 않게 어울린다.
일요일이면 시장 앞 인왕목욕탕에서 목욕 후 이 동네 누구든 어릴 때부터 다녔던 효자베이커리에서 콘브래드를 사 한 입 베어 문다. 늘 여전한 통인시장에서 식혜와 떡을 사 먹으면서 동네 사람들은 시장과 동네 구경에 여념 없는 관광객을 구경한다. 서촌 구석구석에는 동네 부동산이 꽤 많은데 관광객 중에 부동산을 기웃거리며 전월세 시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다.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통인시장에서는 돈을 엽전으로 바꿔 각자 원하는 시장의 반찬을 선택한 후 먹을 수 있는 엽전도시락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엽전 1냥에 500원, 엽전 1~2냥, 혹은 2~3냥으로 떡볶이 요만큼, 닭강정 1~2개, 미니우동, 전과 잡채 조금씩 사서 나만의 도시락을 만들어 먹는다. 관광객에게 인기다. 일본인과 중국인 관광객도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소박하게 한식 탐험을 한다. 엽전은 오후 4시까지만 살 수 있어 겨울에도 점심 인근엔 시장이 왁자하다. 서울가이드북에 빠지지 않아 언제라도 최소 30분 이상 줄을 서야 하는 토속촌삼계탕 대신 통인시장의 소소한 모듬분식도 괜찮다.
골목길에는 1988년 시작된 옥인오락실과 1951년에 생긴 헌책방 대오서점이 있다. 관광객에겐 핫플레이스이고 동네 사람들에겐 일상의 풍경 같은 곳이다. 옥인오락실에서 500원을 넣고 보글보글, 테트리스, 두더지, 1945, 스트리트파이터 같은 옛날 오락을 하며 깔깔거리고, 대오서점에선 차 한잔에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본다. 대오서점은 아이유 앨범 ‘꽃갈피’의 재킷 사진 속 그곳이다.
서촌에는 옛 문인들의 흔적도 많다. 이상과 이중섭, 이광수, 노천명, 구본웅의 집터가 있고 윤동주의 하숙집 터가 있다. 화가 박노수의 집은 미술관이 되었다.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근에 겸재 정선의 생가터와 송강 정철의 생가터, 추사 김정희의 집터도 있다. 게다가 서촌 한복판은 세종대왕이 나신 곳이라 길 이름이 ‘한글길’이다.
예술인들의 집터가 많다고 예술마을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대대로 예술가들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인왕산의 기운이 미친 것일까. 일일이 거론할 순 없지만 지금도 많은 예술인과 방송인, 영화인을 비롯해 작가와 화가 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산다. 새벽이나 늦은 밤, 의외의 골목이나 슈퍼와 빵집에서 우연히 이들과 마주치는 건 서촌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다.
잔잔하고 조용한 동네인 서촌에서 평일 저녁, 특히 금요일 밤에 특히 왁자지껄한 골목이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세종마을음식문화거리가 펼쳐진다. 금천교시장이라고 불리는 이곳에 20~30개의 유명 술집들이 한 골목에 몰려 있다. 인근 직장인들의 만남의 장소, 직장인들의 저녁 재미인 ‘술생활’의 메카다.
현지에서 직송하는 해산물 술집 ‘계단집’은 술집임에도 사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다. 전과 국수로 유명한 ‘체부동잔치집’도 이 골목의 터줏대감이다. 안쪽에는 심마니가 운영하는 막걸리집이 있고, 핫한 수제맥줏집과 철판요리를 내는 집도 있다. 고깃집과 쪽갈비집, 곱창집, 주꾸미집 사이로 아시아퓨전요리집, 일본식선술집, 횟집 등 안주 메뉴가 모두 모여 있다. 올 때마다 새로운 곳을 다니며 일명 ‘도장깨기’ 하는 맛도 쏠쏠하다. 술맛, 안주맛, 사람맛이 뒤섞여 쉬이 질리지 않는다.
서촌에서는 길을 잘못 들어 골목을 헤맨다 한들 성공이다. 아니 길을 좀 잘못 들어야 서촌 걷기의 사랑스러운 맛을 제대로 알게 된다. 골목을 헤매다보면 술집 골목에서 문득 한옥길로, 다시 카페거리로, 또 동네 주민이나 갈 법한 후미진 동네 뒷길로 연결된다. 골목이 집들을 연결하고 풍경을 연결하고 사람을 연결한다. 청와대 인근이고 동네가 밀집되어 있어 치안도 좋다. 밤이라도 안전한 골목탐험이다. 낮도 좋지만 술 한 잔 기울인 밤 산책도 좋다.
서촌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시작되는데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2번 출구에서 마을버스 종로09번을 타면 종점인 수성계곡까지 서촌을 크게 한 바퀴 휘돌아가니 마음에 드는 곳에 내리면 된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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